일본 사회복지의 개척자 石井十次(이시이 쥬지)의 사회교육사상 연구
초록
최근 새롭게 제안되고 있는 사회교육은 ‘학교 밖 교육’이라는 영역 중심의 개념에서 탈피하여 ‘사회 속에서, 사회를 통해, 사회를 위해 이루어지는 교육’이라는 기치 아래 교육과 사회와의 관계성에 주목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이러한 사회교육의 학문적 연구과제 중 하나인 사회교육자의 실천과 사상에 대한 역사적 사례 연구를 진행하였다. 즉, 국제적으로 사회적 기능 중심의 사회교육적 실천과 이론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던 19-20세기의 아시아권 사회교육사상을 열전적 방법에 의한 문헌연구로 살펴보았다.
이 연구에서 상정한 石井十次(이시이 쥬지)는 일본 ‘사회복지의 개척자’로서 고아·빈아 교육에 특화된 자선회와 교육회를 통한 사회교육을 실천하였다. 특히, 일본 최초의 고아원인 오카야마고아원의 설립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한 차우스바루고아원의 설립을 통해 일본 사회교육사상의 원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실천의 사상적 토대 및 지향점은 그리스도의 애린정신, Rousseau, Pestalozzi의 자연주의와 노작교육관, 二宮尊徳(니노미야 손토쿠)의 보덕사상, 安部磯雄(아베 이소오)의 사회주의, Tolstoy의 농민해방 정신으로 정리된다. 그리고 石井十次 사회교육의 실천원리로서 본질적 측면에서는 교육과 사회 간의 관계성, 교육을 통한 사회문제 해결과 사회변화, 교육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추구와 같은 원리가 도출되었다. 그리고 사회교육자로서의 자질 및 태도의 확립과 함께 가정교육, 근로·체험교육, 전인교육, 종교교육의 원리가 방법적 측면의 실천원리로 도출되었다.
Abstract
The new idea of social education has shifted away from the domain-centered definition of “out-of-school education” to emphasize the connection between education and society, with the motto “education in, through, and for society.” In this study, as a response to an academic research challenge in the field of social education, we conducted a case study of historical examples of social educators' practices and ideas. Putting it specifically, we examined the social educational thought of Asia in the 19th and 20th centuries, when social educational practices and theories centered on social functions were actively carried out, through a literature study.
Juji Ishii, a Japanese pioneer of social welfare, practiced social education through charity and educational associations that specialized in the education of orphans and poor children. In particular, he established the Okayama Orphanage, the first orphanage in Japan, and the Chausubaru Orphanage for the realization of the kingdom of God, which formed the origin of Japanese social education thought.
The philosophical foundations and orientations of these practices are summarized in the charitable spirit of Christ, the naturalism and labor education of Rousseau and Pestalozzi, the Idea of Returning Virtue for Virtue(Hotoku Shisou) in Sontoku Ninomiya, the socialism of Isoo Abe, and the spirit of peasant liberation of Tolstoy. We derive the following principles of Juji Ishii's social education practice: the relationship between education and society, solving social problems and social change through education, and the pursuit of educational and social values. In addition, the principles of home education, work/experiential education, holistic education, and religious education, along with the establishment of qualities and attitudes as a social educator, were derived as methodological principles of practice.
Keywords:
social education, social welfare, social education thought, Juji Ishii키워드:
사회교육, 사회복지, 사회교육사상, 石井十次(이시이 쥬지)Ⅰ. 서론
최근 개인 중심적인 학교교육의 폐해에서 벗어나고자 공동체 중심의 교육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한창 무르익고 있는 마을교육공동체에 대한 실천적 논의가 그러하고, 사회적 기능 중심의 사회교육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그러하다. 이러한 분위기는 기존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개인의 수월성에 기반한 교육으로는 복잡다기하게 전개되고 있는 사회문제들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유, 평등, 민주주의와 같은 인간사회의 보편적 윤리마저 지켜내지 못한다는 반성과 비판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교육 전반의 문제 해결에 새롭게 제시되고 있는 ‘사회적 기능 중심의’ 사회교육은 현대사회에 유의미한 교육적 기제로 기대된다. 사회교육은 ‘사회 속에서, 사회를 통해, 사회를 위해 이루어지는 교육’이라는 기치 아래, 사회적 약자 지원과 사회공동체 형성, 사회문제의 해결과 사회변화, 민주시민사회와 평생학습사회의 구현을 지향하며 교육과 사회와의 관계성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오혁진·김미향, 2017). 또한 이러한 사회교육적 관점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권, 영미권, 일본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최근의 국제적 흐름에도 부합하고 있다(김미향, 2021; 오혁진·김미향, 2017). 이러한 사회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 정체성이나 방향성에 대한 성찰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연구자는 사회교육학의 연구과제 중 하나인 사회교육자의 실천 및 사상에 대한 역사적 사례 연구를 진행하였다(오혁진, 2016; Bergevin, 2006). 사회교육사상 연구는 과거에 이루어진 사회교육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사회교육의 지향점 및 실천원리 등의 이론을 도출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사회교육 발전에 이바지하는 중요한 학문적 작업이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도 사회교육사상과 관련된 연구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곽태진, 2015; 김창희, 2018; 박인주, 2017; 오혁진, 2017, 2018; 이호성, 2017). 특히 우리나라 사회교육자 10인의 교육사상을 심도있게 분석한 오혁진(2016)의 연구와 세계적으로 사회교육의 실천과 이론에 초석이 된 서구권 사회교육자의 교육사상을 분석한 김기환(2020)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연구 대부분이 우리나라와 서구권의 사회교육자에 집중되어 있어 학문적 편향성이 우려된다는 점에서 연구자는 아시아권 사회교육자 중 한 사람인 일본의 石井十次(이시이 쥬지, 1865-1914)의 사회교육사상을 고찰하였다.
石井十次는 일본에서 ‘아동복지의 아버지’로 불리는 메이지기(明治, 1868-1912)의 자선사업가로 일본의 사회복지 및 교육 분야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일본의 대외침략과 산업화가 왕성하게 이루어지던 사회격변기에 일본 최초의 고아원인 오카야마(岡山)고아원을 설립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에 기초한 고아교육을 제창하며 실천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교육사상은 일본 다이쇼기(大正, 1912-1926) 이후의 사회입법과 사회교육, 노작교육과 개성교육 등과 같은 일련의 신교육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도 평가된다(岡崎正幸,1981). 그리고 그의 생전 한일 문화교류의 요충지였던 부산, 인천, 서울에서 자선활동을 펼치는 등 경성고아원과 부산고아원의 설립에 얼마간의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의 관련성도 존재한다.1) 아울러 石井十次는 자신이 설립한 오카야마고아원 원아들의 이주처, 새로운 고아원 설립의 장소, 그리스도교 전도를 위한 동양구세군의 진출처로서 대한제국을 일찍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安東邦昭, 2009, 2010, 2014).
이 연구는 石井十次의 사회복지적 실천 속에 녹아있는 사회교육의 지향점과 실천원리를 도출함으로써 사회교육의 정체성 및 방향성 확립이라는 이론 정립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열전적 방법에 의한 문헌연구로 진행된 이 연구는, 石井十次와 관련된 주요 1차 자료로 石井十次일지(日誌)2)의 일부와 함께, 그를 기념하기 위해 사후에 설립된 공익재단법인 石井十次창현회와 石井기념우애사(友愛社)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내용을 참고하였다. 아울러 石井十次의 사후에 발간된 전기적 성격의 문헌(柿原政一郎, 1960; 西内天行, 1918; 小野田鉄弥, 1934; 時本堅, 1951)과 당시 오카야마고아원을 소개한 다수의 문헌들(石田祐安, 1895; 石井十次, 1900a, 1900b; 小野謙次郎, 1909; 坂本義夫, 1907)도 연구자료로 참고하였다. 그러나 관련 자료의 양적 방대함과 고어에 대한 번역의 어려움 등으로 그의 생애 및 사회교육활동과 같은 객관적인 사실은 그의 일대기를 상세히 다룬 2차 연구물(岡崎正幸, 1981; 恒益俊雄, 2001; 山本浩史, 2010)과 관련 기관의 홈페이지 내용을 중심으로 교차검증하였다. 다만, 연구자료 대부분이 石井十次의 업적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라는 점과 직접적으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인터뷰가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비판적 분석에 한계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연구방법을 통해 우선 石井十次의 삶과 사회교육활동을 깊이 있게 살펴보고 그의 사회교육사상의 토대 및 지향점을 고찰하면서 사회교육의 실천원리를 도출하였다. 사회교육 실천원리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는 사회교육의 본질적 측면, 방법적 측면, 사회교육자의 자질이라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하여 진행하였다(김기환, 2020). 그리고 石井十次 사회교육사상의 의의 및 한계를 비판적으로 정리하면서 향후 우리나라 사회교육의 발전을 위한 시사점을 제시하였다.
Ⅱ. 石井十次의 생애와 사회교육 활동
1. 石井十次의 생애
石井十次는 1865년 5월 5일 미야자키현 다카나베정 바바노하루(宮崎県 高鍋町 馬場原)에서 다카나베번(高鍋藩)의 하급무사인 石井万吉(이시이 만키치)와 乃婦子(노부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주위의 불쌍한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으며, 일찍이 6세부터 다카나베번 명륜당(明倫堂)에서 한학을 배우며 기본적 사상 및 인격을 형성하였다. 14세(1879년)에는 해군 사관생이 되기를 꿈꾸며 도쿄의 공옥사(攻玉社)에 입학했지만 각기에 걸려 1년만에 퇴학하였다. 이후 1880년 술자리에서 쓴 반정부 글(岩倉具視 암살 계획)로 인해 국사범으로 2개월 간 투옥되게 되는데 옥중에서 西鄕隆盛(사이고 다카모리)3)의 멸사봉공과 경천애인에 기반한 개간사업과 교육관을 접하게 되었다(岡崎正幸,1981). 이에 감동받은 石井十次는 16세(1881년)에 内野品子(우치노 시나코)와 결혼한 후 오지사(五指社)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황무지를 개척하고자 노력했지만 물 부족으로 포기하였다. 이후 카미에(上江)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고 미야자키(宮崎)경찰서에서 서기로 일하는 등 삶을 위한 다양한 도전을 쌓아 나갔다.
그러던 중 그리스도교인이던 미야자키(宮崎)병원 원장인 萩原百百平(하기와라 모모히라)와 조우하면서 그로부터 종교와 의학공부를 권유받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박애정신에 감명받은 石井十次는 17세(1882년)에 의학공부를 위해 오카야마현 갑종의학교(甲種医学校)에 입학하는 한편, 19세(1884년)에는 오카야마기독교회의 金森通倫(가나모리 미치토모) 목사를 만나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을 찾은 石井十次는 교육의 소중함을 호소하며 주경야독의 정신 아래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바바노하루(馬場原)교육회를 설립하였다. 이처럼 石井十次의 출생 이후부터 10대까지의 삶은 향후 펼쳐질 삶에 밑거름이 될 다양한 도전과 기독교에의 입신으로 정리된다.
石井十次는 20세(1885년)가 되던 해에 中村敬宇(나카무라 게이우)의 번역서 ‘서국입지편(西國立志編)’4)을 접하였다. 이 책의 내용에 감명받은 石井十次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함께 빈아·고아교육에 대한 관심을 일체화시켜 나갔다. 21세(1886년)에는 오카야마현 가미아치(上阿知)클리닉에서 대리의로 활동하며 가난한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인 태자당(太子堂)에서 봉사하고 있었는데, 1887년 우연히 한 가난한 어머니로부터 前原定一(마에하라 사다카즈)라는 남자아이를 떠맡게 되었다(岡崎正幸,1981). 이를 계기로 고아교육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고, 점차 늘어나는 고아들을 위해 그해 9월 22일 오카야마시에 소재하는 삼우사(三友寺)의 일부를 빌려 고아교육회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 1만명 이상의 고아를 구제한 영국의 고아원 경영자이자 종교가인 George Müller(1805-1898)가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石井十次는 그의 삶에 감명을 받고 ‘일본의 뮐러’가 되고자 결심하였다. 이후 의학의 길과 자선사업의 양립 가능성을 저울질하며 고뇌의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의사가 될 사람은 나 이외에도 있지만, 고아구제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1889년 의사의 길을 단념하고 고아 구제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岡崎正幸,1981).
앞서 설립한 고아교육회는 이후 오카야마고아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1891년에 발생한 일본 사상 최대의 노비(濃尾)지진과 오카야마시의 대홍수로부터 피해를 입은 고아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수용 인원은 점차적으로 늘어났다. 그의 나이 29세(1894년)에는 고아원 내에 실업교육을 겸한 사업부를 설치하는 한편, 원아들의 성장을 위한 이상향 건설을 위해 고향인 미야자키현 차우스바루(宮崎県 茶臼原)에서 개간을 시작하였다. 이처럼 石井十次의 20대의 삶은 고아교육에 대한 사명감 확립과 사회적 구제의 실천을 위한 초석 마련으로 정리된다.
石井十次는 30세(1895년)가 되던 해에 아내인 内野品子와 사별하고 吉田辰子(요시다 다쓰코)와 재혼하였다. 같은 해 3월 17일 오카야마 교회의 安部磯雄(아베 이소오) 목사를 통해 Tolstoy의 저서와 사회론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교육사상 형성과 이후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런 한편 오카야마 시내에 콜레라가 대유행하여 당초 계획 중이던 실업부의 증설을 대폭 변경하는 등의 역경과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오카야마고아원의 헌법 및 12칙을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자 하는 강한 믿음을 천명하였다.
1897년부터 외국에서도 기부금이 답지하는 가운데, 오카야마고아원 내에 심상소학교를 설립하고 원아들 중심의 음악대와 음악환등대를 구성하여 고아 구제사업을 대외적으로 홍보하며 기부금을 모금하였다. 이듬해인 1898년에는 그의 사후에 유지를 이어받아 활동하게 되는 실업가 大原孫三郞(오하라 마고사브로)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내외의 경제적 후원에 힘입어 1899년에는 유치원을 설립하여 교육활동을 본격화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오카야마고아원은 국가로부터 훈장 및 하사금을 받는 등 명실상부한 일본 최고의 고아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처럼 1900년대에 접어들어 石井十次의 고아교육활동은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며 고아원 경영을 위한 기부금도 순조롭게 모금되고 고위고관직들도 시찰을 오는 등 안정기를 맞게 되었다. 石井十次의 30대는 고아원 경영이 안정권에 접어든 평화로운 시기였으며 사회사업의 전략적 추진을 위해 심상소학교와 유치원을 설립하는 등 교육활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시기였다.
石井十次는 1905년 1월 15일 안정적인 고아원 경영에 안주하지않고 사회적 구제를 필요로 하는 모든 아동들을 위해 ‘무제한 수용’을 선언하였다. 즉 러일전쟁(1904년)으로 인한 전쟁 고아와 도호쿠(東北) 지방의 흉작(1906년)으로 인한 고아를 받아들이면서 오카야마고아원의 원아는 1,200명을 넘어서기도 하였다(岡崎正幸,1981). 이 시기 그리스도교의 전도와 기부금 모집을 위해 음악대와 음악환등대를 이끌고 한국 땅을 밟기도 하지만 식민지 대한제국으로부터 큰 환대를 받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1907년에는 고아들의 삶의 터전이 될 이상향 실현을 위해 일찍부터 개간해오던 미야자키현 차우스바루로 원아 전원을 이주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도쿄사무소와 오사카사무소를 개설하여 그 활동 영역을 확장하였다. 이듬해인 1908년에는 오사카 남부의 빈민가에 아이젠바시(愛染橋)보육소 및 야학교를 설립하고, 도쿄에는 니혼바시동정관(日本橋同情館)을 설립하는 등 세틀먼트사업을 개시하였다(岡崎正幸,1981). 1913년에도 사립차우스바루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를 설립하는 등 의욕적인 사회교육활동을 펼치지만, 49세(1914년)가 되는 해에 지병인 신장병이 악화되어 영면하였다. 이처럼 石井十次의 40대는 고아교육의 확립 및 이상향 실현을 위해 의욕적으로 활동한 사회교육의 확장기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石井十次의 생애 못지않게 사후 그를 기리는 창현활동도 주목된다(https://www.ishiijuji-kenshokai.com). 재단법인 石井十次창현회의 설립(1981년)과 함께 그의 사회구제 정신은 지인들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왔으며, 최근까지도 그와 관련된 기념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다.5) 특히 石井十次 생전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실업가 大原孫三郞는 1917년 재단법인 石井十次기념오사카아이젠엥(大阪愛染園)을 설립하여 아이젠바시 보육소 및 야학교 사업을 이어받았다. 아울러 고아 문제를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식하고 石井十次의 구제사업연구실(호세이대학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의 전신)도 부설하였다.
그리고 1926년 경제적 어려움으로 잠시 활동을 종료했던 차우스바루고아원은 1945년 태평양 전쟁 고아 구제를 목적으로 石井十次의 손자인 児嶋虓一郎(고지마 고이치로)에 의해 石井기념우애사로 그 활동이 재개되었다. 이후 사회복지법인이 되어 아동양호시설과 보육원 등을 운영하다가 지역민들의 요망에 따라 규모가 확대되었는데 현재는 10개소의 보육원과 고령자 데이서비스, 장애자취로지원사업소 등 현내에 20여개의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児嶋草次郎, 2022). 이처럼 石井十次의 사후에도 뜻을 이어받은 후대들에 의해 그의 교육정신과 실천원리가 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石井十次의 사회교육 활동
1887년 3월 21일자의 石井十次 일지에 따르면, 고아구제를 위한 일반 자선사업을 목적으로 고아 및 빈아 교육에 특화된 자선회가 운영되었다. 의학 공부를 접고 고아원 설립의 결의를 굳힌 石井十次는 자선이야말로 인간의 신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하여 고향 사람들에게 자선회에 참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岡崎正幸,1981).
이 자선회의 목적은 ① 뜻은 있으나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학자금 보조, ② 고·빈아의 교육, ③ 기타 : 빈곤자 치료, 맹아교육, 육아, 감옥 전도 등의 자선사업에 두고 있었다. 이러한 목적에 동의함을 전제로 각자의 능력에 맞게 기도하거나, 일하거나, 돈이나 쌀 등의 물품을 후원함으로써 자선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고아의 경우는 5세 이상 15세 이하를 수용대상으로 하여 바르게 양육하고 가르쳐 각각의 재능에 맞게 취업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빈아의 경우는 학습에 필요한 모든 것을 대여하여 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한 본부위원 및 위원을 각지에 두어 후원을 모집하는 등의 일반사무를 위탁함으로써 고학생들과 고·빈아를 구제하는 데 힘을 쏟았다(http://www.yuuaisya.jp/jyuuji). 이처럼 石井十次는 고·빈아에 초점을 맞춘 구제사업을 추진하는 가운데 그 실천방법으로서 사회교육적 대응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石井十次는 고아 한 사람에 대한 구제는 그 가족을 구원하는 것이며, 나아가 사회 전체의 발전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1887년 9월 22일 오카야마시 삼우사에서 고아교육회를 창설하였다(石井十次, 1900b). 다음 <표 1>은 고아교육회 운영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후 고아교육회는 오카야마고아원으로 명칭 변경되어 1903년에는 재단법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907년 4월에는 고아원 경영 및 교육의 기본원칙으로 오카야마고아원 12칙을 제정함으로써 石井十次 사회교육의 실천전략이 명확히 제시되었다. 이후 오카야마고아원은 일본 최초의 고아원으로 자리매김되어 아동 대상 사회복지 및 사회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대표적인 기관으로 현재까지 역사적 평가를 받아오고 있다.
고아교육 이외에 그리스도교의 전도활동과 정치활동에도 뜻을 두었던 石井十次는 오카야마고아원 사업의 완성으로서, 그리고 전도와 정치의 모델로서 차우스바루의 이상향 건설에 온힘을 다하였다. 고아원 출신자들이 자신들의 이력을 숨기며 도시 빈민가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과 고아들 대부분이 병약하다는 사실에서 고아교육의 근본적 개혁이 필요함을 느끼고 고아들 삶의 터전이 될 이상향 실현을 추진하였다(岡崎正幸,1981). Rousseau의 자연주의와 Tolstoy의 농경에 기반한 자활자영의 교육방침에 기반하여 지상에 천국을 실현하기 위해 차우스바루의 개간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1905년부터 이주를 시작하여 남자 원아 50명을 오카야마에서 차우스바루로 이주시키고, 1906년 10월 농림소학교를 설립하여 농업교육을 받게 하였다. 마침내 1907년에는 오카야마고아원과 원아들을 차우스바루로 이전하여 390명을 수용하게 되었다(岡崎正幸,1981; https://www.lion.co.jp). 이와 같이 石井十次는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자각 속에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 구현을 위해 정진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실천이 차우스바루고아원의 설립이었다.
石井十次는 일본 문부성에 의한 제도권 학교교육에 대해 회의를 안고 있었으며, 주지적 교육에 경도된 공교육을 벗어나 삶을 위한 교육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Rousseau, Pestalozzi, Tolstoy 등의 교육사상에 영향받아 자연주의적이고 아동중심적인 교육사상에 기반한 노작교육을 추구하였다. 이에 1898년에는 오카야마고아원 내에 사립 오카야마고아원 심상소학교를 개교하고 원아들을 학교에서 자퇴시켜 자체적으로 교육하였다. 그리고 그의 인생 후반인 1913년 사립 차우스바루심상소학교의 설립과 아이젠바시 야학교의 운영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오사카에 직업 소개와 대필 등의 업무를 진행하는 니혼바시동정관(日本橋同情館)과 아이젠바시보육소를 개소하는 등 다양한 사회교육적 실천을 이루었다.
石井十次가 추구한 이상적인 인간상은, 강건한 신체, 살아있는 지식, 견고한 의지와 덕성을 가지고 하나의 기예를 갈고 닦아 사회를 위해 자발적으로 일하는 근로애호 실천인이었다. 이를 위해 石井十次는 원아들이 사회체험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스스로를 객관화함으로써 새롭게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원외로의 문화활동을 추진하였다. 1903년에는 원아들로 구성된 음악대를 조직하여 전국 각지로 연주여행을 다니는가 하면, 고아원 설립 10주년 기념 영상을 제작하여 각 도시의 공민관과 소학교 등에서 고아원을 소개·선전하기도 하였다(岡崎正幸,1981). 이러한 문화활동은 체험에 기반한 지식과 기예 쌓기라는 교육적 전략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石井十次 사회교육의 중심에는 늘 실천이 자리했지만 그러한 실천내용을 상세히 기록하여 알리고 남기고자 한 노력도 그의 사회교육적 활동의 중요한 일면이었다. 오카야마고아원의 공적 소식지 및 홍보지라 할 수 있는 『오카야마고아원신보(岡山孤兒院新報)』의 꾸준한 발간과 함께 그의 사적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이시이쥬지일지(石井十次日誌)』는 그의 사회교육적 성과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일본 사회복지의 개척자인 石井十次의 대표적인 사회교육 활동을 살펴보았다. 石井十次는 사회적 구제활동을 실천하면서 현재적 의미에서의 ‘구빈(救貧)’은 물론이고 미래적 의미에서의 ‘방빈(防貧)’을 위한 교육의 역할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의 사회교육 활동은 그리스도교 정신에 기반한 하나님 나라 구현이라는 사명감과 함께 불우한 아동에 대한 사회 공동의 책임감에서 비롯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Ⅲ. 石井十次 사회교육사상의 토대 및 지향점
1. 그리스도의 애린정신
石井十次의 사회교육사상은 그리스도교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교는 고아 구제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한 중대한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그의 전 생애를 통한 삶의 지침이 되었다. 특히 石井十次가 말년에 남긴 “하늘은 아버지이며, 사람들은 동포가 되어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하는 존재”라는 문장은 그리스도 정신에 기반한 그의 애린정신을 가장 명확히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児嶋草次郎, 2022). 그는 “천하의 고아를 구제하여 이상적으로 교육하는 것은 곧 전도이며,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며, 천직이며, 내 생명이다”(石井十次, 1905; http://www.yuuaisya.jp/jyuuji, 재인용)라고 밝힘으로써 종교적 사명감을 명시하였다.
이러한 石井十次의 그리스도교에 기반한 교육사상은 특히 그의 말년에 완성한 차우스바루 개척사업을 실천하는 데 있어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이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913년에 제정한 차우스바루헌법6)에도 응축되어 나타난다(岡崎正幸,1981). 즉,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한 사람, 모든 것을 소유하는 절대자로 하나님을 상정하고, 차우스바루의 실천을 성경에 나오는 토지공유의 원리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며 일하는 이상사회의 실현을 지향한 것이라 하였다.
아울러 石井十次는 단순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일방적 수용에 그치지 않고 일본 사회와 풍토에 적합한 그리스도교의 존재방식을 탐구해갔다. 당시 일본 사회의 그리스도적 무사도를 제창한 內村鑑三(우치무라 간조)의 사상과 함께, 西鄕降盛의 경천애인론, 二宮尊徳(니노미야 손토쿠)의 보덕(報德)사상을 현실적으로 구체화하는 뼈대를 그리스도교 정신에서 구하였다. 즉 일본 내에서 태동된 사상과 그리스도교와의 접점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복음의 근본정신을 체득한 石井十次는 하나님 나라라는 이상향을 지상에 실현하기 위한 인간교육을 고민하였으며, 그 결과 노동에 기반한 아이들의 자연성· 개성·자주성의 신장이 교육의 기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石井十次 사상의 핵심은 그리스도교의 인간애 및 애린정신이었으며, 이러한 정신은 그의 사회교육사업으로 발현되었다.
2. Rousseau, Pestalozzi의 자연주의와 노작교육관
石井十次는 당시 일본에 소개된 서양위인전을 탐독하며 그의 사회교육사상을 심화시켜갔다. 우선, 자연중심의 교육이념을 주장한 프랑스의 사상가 J. J. Rousseau(1712-1778)에게서 자연주의와 노작교육에 관한 영감을 얻었다. 石井十次는 1894년 8개월 간 오카야마고아원의 직원이던 小野謙二郞(오노 겐지로)로부터 Rousseau의 『에밀』을 학습하였다. 고아원 경영에 악전고투하던 가운데 접하게 된 Rousseau의 교육사상에 감동한 石井十次는 고아교육의 이상을 『에밀』에 두고 자연주의 교육을 자신의 고아교육에 도입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차우스바루에서의 개간사업을 시도하며 루소주의에 기반하여 농업을 통한 자활자영의 방침을 내세웠다. 즉 노작에 의한 독립과 자영이 가능한 고아원을 차우스바루에 건설하고자 하였다(岡崎正幸,1981).
여기에 더해 石井十次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고아교육의 아버지인 J. H. Pestalozzi(1746-1827)였다. 1890년 8월 石井十次는 『7대 교육열전』에서 Pestalozzi의 전기를 접하고 고아교육에의 의지와 실천을 위한 방법론을 배우게 되었다. Pestalozzi가 주창한 가정교육, 아동중심의 교육, 노작교육은 Rousseau의 교육관과도 일치하는 것이었으며, 평소 고아들이 한 사람의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직업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자활하기를 바랐던 石井十次의 고아교육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특히, 머리·심장·손의 조화를 통한 사물 인식 능력의 개발을 이끄는 노작교육의 중요성과 함께, ‘어머니는 교육의 중심, 가정은 교육의 근원’이라 밝힌 가정 중심의 교육관은 石井十次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찍부터 그리스도교 복음의 근본정신을 체득한 石井十次는 그 이상향을 지상에 실현하기 위한 인간교육의 기초를 노동에서 구하였다. 즉, 일찍부터 Rousseau와 Pestalozzi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교육에 있어서 노동의 의의를 구함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자연성, 개성, 자주성의 신장이 교육의 기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실천에 매진하였다.
3. 二宮尊徳(니노미야 손토쿠)의 보덕사상
石井十次의 사회교육사상에 영향을 끼친 일본 내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덕으로서 덕에 보답한다”는 보덕(報德)사상을 주창한 二宮尊徳(1787-1856)를 들 수 있다. 경세제민(経世済民)을 지향한 二宮尊徳는 물건이나 사람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천성, 특기, 장점, 가치, 은혜, 덕분 등을 덕(徳)으로 삼아 이를 잘 활용하여 사회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을 “보덕(報徳)”이라 불렀다. 보덕사상이란 ‘지성(至誠)’을 기본으로 하여 ‘근로(勤労)’, ‘분도(分度)’, ‘추양(推譲)’을 실행하는 개념7)으로, 二宮尊徳는 이러한 보덕사상에 기반한 농촌부흥정책을 실천함으로써 기근이나 재해로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던 마을들을 부흥시켰다. 이러한 二宮尊徳의 보덕사상은 현재에도 일본 사회에서 지속가능한 지역사회개발을 위해 활용되고 있다(野尾裕·見城悌治·落合功, 2023; https://www.city.hadano.kanagawa.jp; https://www.city.moka.lg.jp). 인간생활의 구체적인 존재방식으로써 근로와 공동체성을 강조한 二宮尊徳의 사상은 신과 인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서 사회를 조직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石井十次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石井十次는 二宮尊徳의 보덕사상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二宮尊徳 선생은 일본의 그리스도’(西內天行, 1918,p. 625)라며 二宮尊徳와 그리스도의 통합을 나타내는 ‘기덕교(基德敎)’를 주장하기도 하였다(岡崎正幸,1981). 농업을 만업의 근본(大本)으로 본 二宮尊徳의 사상과 근로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온다는 그리스도교의 이상이 통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또한 石井十次는 고아원 경영에서 악전고투한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경제와 종교는 조화·융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종교와 경제의 통합을 보덕사상에서 발견한 石井十次는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일용할 양식’이 정신적 양식만이 아니라 의식주의 해결까지도 포함한다고 생각하고 보덕사상과 그리스도교의 조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4. 安部磯雄(아베 이소오)의 사회주의
石井十次의 일지에 ‘사회당’이나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꽤 이른 시점에서 등장하는데, “20세기의 큰 흐름은 사회주의이며 20세기라는 무대에 서서 일을 하고자 욕심내는 사람은 반드시 이 큰 흐름에 올라타야만 한다”(石井十次, 1896)고 적고 있다. 그는 일본 내에서 발행되던 『육합잡지(六合雜誌)』, 『신사회(新社會)』, 『독립평론(獨立評論)』 등을 접하며 사회주의를 학습해나갔다. 특히, ‘사회조직의 변혁’과 ‘눈앞의 시급한 구제’, 즉 사회주의와 사회사업의 동시평행적 추진을 주장해 온 安部磯雄(1865-1949)8)의 논문과 저서들을 적극적으로 탐독하며 일찍부터 사회주의에 관심을 나타냈다.
당시 일본에서 소개된 사회주의 개념은 개인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기주의, 자유경쟁, 약육강식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개인주의는 다양한 빈곤문제의 원인으로서 부정적으로 취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石井十次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은 개인주의에 대항하는 존재로서의 사상으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회구조 변혁의 필요성이나 군주·천황제와 같은 정치적 시스템의 개조보다는 사회공동체를 지향하는 정신으로서의 사회주의를 뜻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여타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구빈과 방빈을 위한 사회개량사업 정도의 안목에 머물러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의 삶의 궤적에서 사회사업을 위한 사회주의에 대한 학습과 관심은 남달랐다고 하겠다.
5. Tolstoy의 농민해방 정신
石井十次는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L. N. Tolstoy(1828-1910)의 언행록을 접하며 농민 중심의 사상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사회상태를 조사한 Tolstoy는 가장 순박하고 마음씨 아름다운 인간을 농민 계층에서 찾았으며 이들을 빈곤에서 구제하고자 농민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岡崎正幸,1981,p. 114; 柴田義守, 1978,p. 201, 재인용). 농민을 빈궁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Tolstoy는 백작이라는 영예로운 직위를 내던지고 야스나야 폴랴나에 농민소학교를 설립하여 농민 해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적 개혁가로서의 Tolstoy의 빈민 구제를 위한 실천에 마음을 사로잡힌 石井十次는 향후 자신의 사회사업에 한층 자신감을 갖고 임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일찍부터 그리스도교 사상에 뿌리내린 石井十次는 교육적인 측면에서는 Rousseau, Pestalozzi, Tolstoy와 같은 서양 사상가들을 통해 습득한 자연주의, 농업 중심의 노작교육, 농민 중심의 사상에 영향받았다. 그리고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일본 내의 二宮尊徳의 보덕사상과 安部磯雄의 사회주의에 영향받음으로써 그의 사회교육사상의 토대 및 지향점을 구축할 수 있었다.
Ⅳ. 石井十次 사회교육의 실천원리
1. 사회교육의 본질적 측면
石井十次 사회교육의 실천원리 중 그 본질적 측면을 살펴보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石井十次는 교육과 사회 간의 관계성에 주목하여 교육을 진공상태에서가 아닌 사회와의 관계성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사회 안에서 성장하고 생활하는 가운데,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다양한 자원을 활용한 교육을 통해 인성과 경제적 능력이 확립됨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해감은 물론이고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가정을 인류사회의 원형이자 사회훈련의 장으로 상정하고, 가정 내에서의 관계는 자연적이고, 최초이며, 가장 순수한 것으로 인간교육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즉, 가정이라는 사회를 도덕심과 종교심 형성을 위한 장으로 보았다. 가정을 닮은 고아원 내의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함양된 도덕심과 종교심에 기반하여 전면적인 인간 형성을 이룸으로써 일반사회에 나갔을 때 도덕적 실천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둘째, 石井十次는 교육을 통한 사회문제 해결과 사회변화에 주목하였다. 그는 전쟁 및 자연재해로 사회문제가 된 고아와 빈아에 대한 구제를 위해 누구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단순한 물질적 보살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성장·발전함으로써 스스로의 주체성 확립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그들이 이룬 가정이 또 다른 고아들을 구제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장기적 플랜을 제시하였다. 그의 사회교육적 실천이 보다 거시적인 이념이나 가치를 지향하며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추구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교육을 통해 우리 주변의 사회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사회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
셋째, 石井十次는 기본적으로 교육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였다. 그의 삶에서 교육을 통한 한 개인의 지·덕·체의 성장과 변화가 우선된 후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도덕과 자질을 갖추어 성장하고, 이러한 성장과 더불어 경제활동이 가능한 자신만의 직업능력을 길러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기를 바랐다. 즉 이러한 개개인의 발전 및 의지에 기반하여 점차적인 사회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사회경제적으로 빈궁하고 어려운 시대적 환경에 영향받은 측면도 있어 실제적으로는 교육적 가치보다는 사회적 가치에 좀 더 치중된 결과로 나타났다고 평가된다.
2. 사회교육의 방법적 측면
가정을 교육의 출발점이 되는 작은 사회로 본 石井十次는 각 가정의 어머니를 ‘땅의 소금’,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대리자’로 상정하였다(岡崎正幸,1981). 아이들 양육에 있어 어머니의 사랑을 강조하고 그러한 사랑이 존재하는 가정에서의 교육을 중시하였다. 石井十次는 사랑에 기반한 가정에서의 교육을 통해 형성된 신앙심과 종교적 의식이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며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이러한 가정교육의 원리를 고아교육에 적용한 것이 오카야마고아원의 12칙 중 가족주의와 위탁주의이다.
먼저 石井十次는 고아원을 가족 단위의 규모로 운영하는 가족주의를 채택하였다. 고아원 운영 초기에는 남자, 여자, 유아부로 분리된 숙사를 운영하며 획일성과 엄격함으로 무장된 군대식으로 일관해왔다면, 가족주의를 채택한 이후에는 원아를 10-15명 단위의 소집단으로 나누어 작은 기숙사에 배당하고, 여기에 1명의 주부(主婦)9)를 두어 원아들을 돌보게 하는 시스템(家族舍制)으로 전환하였다. 즉 작은 기숙사는 가정의 역할을, 주부는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함으로써 각 가정의 자주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고아원 전체의 통일성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민주적이고 자주적으로 운영하였다(岡崎正幸,1981).
다음으로 위탁주의는 소기숙사에서 생활하기 어려운 원아들을 원외 가정에 위탁하여 양육을 의뢰하는 것을 말한다. 石井十次는 허약체질로 발육이 불량한 5, 6세 아동을 대상으로 1905년 5월부터 위탁제도를 실시하였다. 위탁부모(里親)의 인품 및 가정환경을 상세히 조사한 후 신뢰할 수 있는 농가에 양육을 의뢰하였는데 1911년에는 그 수가 545명에 이르렀다(岡崎正幸,1981). 원아들의 신체적 발육, 인간 형성력에 큰 성과를 보이며 오늘날의 일본 위탁부모(里親)제도의 기원이 되었다.
이와 같은 石井十次의 가족주의와 위탁주의의 실천은 오늘날의 학교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해결의 열쇠로서 주목받고 있는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石井十次는 노동을 중심에 두고 인간성을 도야한 Pestalozzi의 교육사상에 영향받아 고아교육에 근로·체험교육의 원리를 받아들였다. 그는 근로를 실천적 전아(全我)활동이라 생각하였으며, 근로·체험교육을 통해 노작에 의한 정신과 신체의 가치교섭 작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특히, 직업이 없이는 인류, 국가, 사회에 공헌하지 못할 뿐 아니라 스스로의 주체적 확립도 불가능하다고 본 그는 “노동은 인물 양성에 최상의 방책이며, 노동학문병행주의는 실제 사회를 살아가는 실천인 양성의 쇠지팡이가 된다.”고 밝히며 노동학문병행주의를 제창하였다(石井十次, 1894; 岡崎正幸,1981,p. 69, 재인용). 나아가 근로·체험교육을 통해 직업기술을 습득하여 독립자활의 길을 여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성 또한 도야함으로써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근로·체험교육의 원리에 기반하여 石井十次는 실업교육, 소학교교육, 여행교육, 실행주의를 제시하였다.
먼저, 石井十次는 근로를 통한 경제생활 영위가 원아들에 대한 진정한 구제라고 보아, 그들로 하여금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업에 종사케 하는 실업교육을 고아교육의 이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오카야마에는 개간할 만한 토지가 없어서 농업 이외의 직업교육(밀짚모자, 화문석, 베짜기, 성냥 제조, 활판인쇄, 이발업, 목수일, 정미·제분업, 대장업)을 실시하였다. 1891년 박애사(博愛社) 농장에서 남자아이 20명으로 하여금 농업을 배우게 하거나, 오카야마고아원을 개간지인 차우스바루로 이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岡崎正幸,1981).
둘째, 石井十次는 근로와 지육과의 일체화를 통해 실천인이 육성된다고 확신하고 1890년 11월 원내에 소학교를 설치하였다.10) 문부성의 제도권 교육에서 이루어지는 주지주의적 학교교육을 비판하며 원아들이 통학하던 오카야마시립 소잔(操山)소학교에 퇴학계를 제출하는 등 노동학문병행주의 교육을 실현하고자 하였다(岡崎正幸,1981,pp. 75-76; 柴田義守, 1978,p. 80, 재인용). 이는 지식과 노동, 정신과 육체의 융합, 지·덕·체의 일체화를 갖춘 인격 완성을 염두에 둔 과감한 결단이었다.
셋째, 石井十次는 원아들이 세상에 나갈 때를 대비하여 사회 현실에 접할 수 있는 기회로서 여행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는 사회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원아들로 하여금 세상을 견문하고 지식을 심화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교육이었는데, 1903년부터는 여행 자금의 마련을 위해 음악대를 조직하여 연주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岡崎正幸,1981).
넷째, 石井十次는 원아들의 실천력과 주체성 함양을 위해 지도자의 솔선수범을 의미하는 실행주의를 역설하였다. 그는 “7백명 원아의 행동은 직원 행동의 반영이다. 그 중심에 선 내 책임의 중대함은 분명하다. 원아 교육에서 내가 취할 주의는 말로서 가르치지 않고 행함으로써 보여주는 것에 있다”(小野謙次郎, 1909,p. 56; 岡崎正幸,1981, p. 84, 재인용)며 솔선수범에 의한 사제동행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石井十次에게 있어 전인교육은 아동의 자주성과 자발성을 소중히 하며 아동을 전체로서 고려함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과 적성의 조화적 발전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전인교육은 개성 존중의 교육이었다. “사람은 사람, 벚꽃은 벚꽃, 매화는 매화이다. 각자 독특한 천성을 신장시켜야 하며 각각 그 직분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길”(石井十次, 1889; 岡崎正幸,1981,p. 87, 재인용)임을 강조하였다. 石井十次는 이러한 전인교육의 원리에 기반하여 만복주의, 밀실교육, 비체벌주의를 제시하였다.
먼저, 원아들의 정신 및 신체가 함께 조화적으로 발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 만복주의로, 오카야마고아원에서는 원아들에게 배부를 때까지 먹게 하였다(岡崎正幸,1981). 식사 양을 정하는 것은 원아들이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힘을 만류하는 것이며, 식욕을 만족시키지 못한 원아들은 음식이나 금전을 훔치는 등의 습관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만복주의야말로 “발육을 회복하고, 나쁜 버릇을 제거하고, 천진한 자연의 심성을 발휘시키는 좋은 방법” (岡崎正幸,1981,p. 93; 石井十次, 1909, 권말부록, 재인용)이라고 생각하였다.
둘째,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소중히 다룬 밀실교육으로, 일대일로 마주앉아 서로 대화함으로써 심정에 호소하며 훈육지도하였다. 石井十次는 “선을 상주고, 악을 벌하는 것은 반드시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해야 한다. 이를 본원의 밀실교육이라 한다.”(岡崎正幸,1981,p. 93; 小野謙次郞, 1909,p. 59, 재인용)고 밝혔다. 고아원 내의 주부와 교사는 문제아동을 사람이 없는 방에서 훈육한 후 아이들과 함께 신에게 기도를 올렸는데 이러한 밀실교육 역시 인본주의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石井十次는 아이들을 인격적 존재로 인식하고 체벌은 교육에 있어 가장 피해야 할 수단으로 여겨 비체벌주의를 채택하였다. 아이들에게 회초리를 들면 오히려 거짓말이나 허언을 하게 된다고 보아 원아들에게 자유를 주어 천진난만하고 쾌활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오카야마고아원의 운영목표와 石井十次의 교육목표는 노동, 학문, 종교의 삼위일체화를 통해 사회에 유익한 인재를 배출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교 정신에 기반하여 원아들을 ‘인격 완성자’(眞人)로 기르는 것이었다. 石井十次에게 있어 종교생활은 인간생활 전부와 모든 정신생활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교육의 원리에 기반하여 종교주의, 쌀씻기(米洗)교육, 탁발주의를 제시하였다.
먼저, 石井十次의 고아교육은 그리스도교 정신을 함양하는 것에 목적을 둔 종교주의에 기반하였다. 그는 일상생활 중에서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정신을 원아들의 실생활과 연결시키며 교육하였다. 나아가 개인의 두뇌와 심정과 실행이 가장 긴밀하게 조화·통일되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종교(도덕)적 성능을 최고로 삼고, 지적 능력 및 체력은 종교 아래에 두어 종교의 지배를 받게 함으로써 비로소 세 가지가 통일된다고 보았다(岡崎正幸,1981). 즉 종교를 최상의 가치로 상정한 것이다.
둘째, 매일 아침에 실시되는 전체집회 중에 이루어지는 그리스도교에 관한 강연을 ‘쌀씻기 교육’이라 불렀다. 이런 매일의 강연이 반복되어 이루어짐으로써 원아들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변화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그 과정을 쌀을 씻는 과정에 비유하였다.
“술도가가 쌀을 씻을 때는 ⋯ 몇 번이나 물을 교환하는 동안에 쌀겨가 제거되고 진주와 같은 쌀 본래의 색이 되는데, 마치 이와 같이 인간의 아이들, 가지가지 다양하게 착색된 것을 한 곳에 모아 물을 붓고 휘젓는 동안에 언제인지 모르게 그 부착 분자가 사라지고 천진한 특질을 발휘하게 된다”(岡崎正幸,1981,p. 105; 小野謙次郞, 1909,p. 63, 재인용)
셋째, 石井十次는 그리스도교를 전도하고 오카야마고아원을 유지하기 위해 탁발주의를 실행하였다. 그는 일지에서 노동생산에 의한 고아원의 독립자영을 빈번히 ‘독립전쟁’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않는 고아원의 재정 상황 타개를 위해 고아구제를 널리 호소하며 찬조회원제는 물론이고 기부금을 모았다. 石井十次는 이를 탁발주의라 불렀는데, 고아원 경영 후반에는 원아들로 이루어진 음악대와 환등대의 활동을 통해 고아원 홍보와 그리스도교의 전도를 하며 고아원 운영 기금을 마련하였다.
3. 사회교육자로서의 자질 측면
石井十次가 추진한 사회복지 활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회교육적 실천으로, 그러한 활동 안에 나타난 사회교육자로서의 자질 및 태도를 정리해보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자신이 정한 삶의 본분에 대한 책임감일 것이다. 石井十次는 종교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의사로서의 세속적 성공을 두고 거듭된 고민을 한 후 사회에 대한 책임감으로서 전자를 선택하였다. 그는 1889년 1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성경 구절을 읽고 삼우사 앞마당에서 그간 공부해 온 의학서와 노트를 소각함으로써 자신의 직업상의 임무를 일반 자선사업으로 받아들이고 그 책임감과 사명감을 다하는 데 일생을 보냈다.
둘째, 공동체 정신에 기반한 사회적 약자 구제의 정신을 들 수 있다. “나는 고아의 친구이고, 맹아의 친구이고, 병자의 친구이고, 과부의 친구이고, 수인의 친구”라 하여 스스로를 “육우거사(六友居士)”라 칭하며 약자 편에 선 삶을 살았다(石井十次, 1888; 岡崎正幸,1981,p. 35, 재인용). 또한 고아원 교육 사업에 뜻을 가진 각 개인의 힘은 미약하지만 이를 협력해서 행한다면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며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였다.
셋째, 평생학습을 통해 함양한 문제해결 능력을 들 수 있다. 石井十次가 고아교육에 몸 바치고자 결심하기까지, 그리고 그 실천에 있어서 전략적 방법을 강구하기까지 여러 선구자들의 영향이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물론이고 George Müller와 같은 고아원 운영자들, 그리고 Rousseau, Pestalozzi, Tolstoy와 같은 서양 사상가들의 정신과 실천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石井十次의 평생학습적 의지가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는 이들 사상가들의 영향을 무조건적 수용이 아닌 비판에 의한 내면화를 통해 그만의 고아교육 원리로 구축하였다. 그리고 고아원 교육과 경영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 원리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솔선수범의 실천력까지 보여주었다. 특히 그가 보여준 독서와 기록의 실천은 오늘날의 현대인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石井十次의 사회교육 실천원리는 ‘사회 안에서, 사회를 통해, 사회를 위해’ 이루어진다는 사회교육 개념에 근본적으로 부응하고 있다. 石井十次는 원아들의 교육을 위해 고아원의 내외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당시의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국가 및 인류공동체에 이바지하는 데 진력하였다. 또한 교육과 사회 간의 관계성, 교육을 통한 사회문제 해결과 사회변혁, 인본주의에 기초한 전인교육, 사회교육자의 자질 확립과 같은 사회교육적 함의에도 부합되고 있다. 그리고 사회교육의 방법적 측면에서 다양한 실천원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기능에 주목한 도구적 기제로서의 사회교육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Ⅴ. 石井十次 사회교육사상의 의의 및 한계
1. 石井十次 사회교육사상의 의의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 기반하여 石井十次 사회교육사상이 갖는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石井十次는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교육이라 인식하고 교육을 통한 아이들의 전인적 성장에 기반한 사회변화를 추구하며 사회구제 활동에 헌신하였다. 단순한 동정심에서 출발한 고아와 빈아에 대한 그의 사회구제 활동은 교육이 매개가 됨으로써 교육회나 고아원이라는 형태로 발전해나갔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라는 이상을 위해 끊임없이 교육의 역할과 기능을 확인하며 그 방향성과 전략을 모색하였다. 그런 결과, 그가 이상적 교육으로서 지향하고자 한 것은 지·덕·체의 균형잡힌 성장을 통한 전인교육, 문부성의 주지주의에서 벗어난 인본주의적 교육, 노동학문병행주의로 대표되는 노작교육이었다. 이러한 교육관은 그의 사후 일본의 사회교육, 노작교육, 개성교육과 같은 일련의 신교육운동에서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둘째, 石井十次의 사회교육적 삶은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 공동체 의식보다는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애린정신에 기반한 종교적 공동체 의식이 우선된 것이었다. 그는 천황 역시도 자신과 대등한 복음 전파의 객체로 생각할 만큼 그의 사회교육 실천과 사상은 종교적 신념의 위대함을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의사라는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입신양명을 뒤로 하고 그리스도교의 인류동포애적 사명감과 애린사상, 솔선수범의 정신으로 고아들을 위한 사회적 구제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국가주의 공동체 의식에 앞서 신실한 종교적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셋째, 石井十次는 평생학습의 자세와 탐구력으로 사회구제 및 교육과 관련된 당대 문헌과 사상들을 섭렵하며 사회교육의 실천방법 및 해결책을 모색하고 그 실천원리를 제시하였다. 서양의 신문물과 학문을 일찍부터 받아들였던 일본이라는 환경적 요인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다양한 교육사상가와 실천가들의 면면을 고아교육에 녹여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평생학습적 자세가 큰 몫을 했다고 생각된다. 특히 그가 35년 간 기록한 방대한 양의 일지는 역사 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넷째, 石井十次의 교육 사업과 사상은 한국의 고아원 교육 및 사업의 시발점에 영향을 주었다. 그가 조직한 음악환등대의 방한활동은 고아원에 대한 고위관료 및 일반대중의 관심을 환기시켰으며, 그가 설립한 오카야마고아원은 대한제국의 사립 고아원에 의미 있는 선진기관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구한말·일제강점기라는 지배와 피지배의 시대적 관점을 넘어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교육의 기능이라는 사회교육적 관점에서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2. 石井十次 사회교육사상의 한계
과거의 사실을 현재적 시점에서 재단하여 평가하는 것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石井十次의 사회교육사상이 갖는 한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이 겪고 있는 사회문제의 원인을 개인 삶의 태도와 소양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구조적 변화보다는 개인의 변화를 통한 사회발전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변화 중심의 기초적 사회변화를 추구하였다. 눈 앞에서 일어나는 고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조차 급급하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냉철한 사고를 통한 사회구조적 해결방안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사회 전반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배경 원인에 대한 거시적인 인식보다는 개인의 갱생 및 교육에 초점을 맞춘 石井十次의 관점은 분명 한계를 갖는다. 후대에 石井十次의 유지를 이어받았던 大原孫三郞는 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사회문제 및 노동문제를 해결하고자 관련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후대의 노력에 의해 石井十次 사회교육사상은 그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와 비판적 관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둘째, 石井十次의 국가관과 천황관이 일본의 군국주의라는 시대적·사회적 배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밝힌 종교적 신념의 위대함과 배치되는 한계점으로 그가 살아온 시대가 가져다주는 태생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石井十次 자신도 사회적 구제사업은 국가나 재력가들이 나서서 해야 할 일이라고 그 어려움을 토로했듯이 그의 활동에 있어 일본 황실로부터의 하사금, 대한제국 황태자 및 고위관료들의 지원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인류 공영과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지하며 그에 걸맞은 인재 양성을 교육의 목적으로 천명하면서도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하지 못하였다. 큰 그림 안에서 인간사회의 근간을 바로잡을 것인가, 일상 속에 펼쳐지는 미시적 문제를 먼저 해결할 것인가의 사이에서 생활인으로서의 현실적 대처가 우선된 것으로 보여진다.
셋째, 일생을 고아교육에 바친 石井十次이지만 사회교육 활동의 초반에는 어려움의 고비마다 자활자영의 태도보다는 종교적 기도를 통한 구원을 갈구한 측면이 있었다. 이후 40대에 접어들면서 여러 교육사상가들의 영향에 힘입어 인간 스스로의 자활자영을 통한 자립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적극적인 개간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고아원 이주를 위한 개간사업이나 고아원 홍보 및 기부금 모집을 위한 음악대와 음악환등대 활동에 원아들이 투입되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애써 노작교육과 체험교육의 일환으로 그 의의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현재적 시점에서 바라봤을 때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Ⅵ. 결론
지금까지 일본 사회복지의 개척자인 石井十次의 사회구제 활동에 나타난 사회교육사상을 살펴보았다. 石井十次가 활동한 시기는 대외적으로는 청일·러일 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를 꾀하던 대외침략 시대였고, 대내적으로는 산업개발에 의한 경제적 번영을 통해 봉건사회로부터 근대국가로의 급격한 전환이 이루어지던 사회격변기였다. 하지만 그 발전과 번영의 그림자로 인해 빈곤과 어려움에 직면한 사회적 소외계층이 속출하게 되고, 이에 대한 국가적 대응은 미흡하여 개인적 차원에서의 사회복지적 노력이 요청받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사회문제로 야기되던 고아와 빈아들에 대한 사회적 구제를 그리스도교 정신에 기반한 애린정신과 교육을 통해 풀어가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현재까지도 다양한 형태의 기념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石井十次의 사회교육은 가정과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하는 가운데, 노작교육과 전인교육을 통한 경제적 자립, 종교교육을 통한 정신적 안정, 지·덕·체의 일체화를 통한 인격의 완성을 목표로 하였다. 그는 이러한 교육으로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여 배출하고 이로써 국가의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일생동안 견지하였다.
石井十次는 사회구제라는 시대적 사명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부응한 후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만약 그의 삶이 조금 더 이어졌다면 그가 가진 신실한 종교적 사명감, 왕성한 평생학습 의지와 탐구심, 인본주의에 기반한 전인교육에의 확신, 교육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은 어떻게 발전하고 성장해 갔을까? 아쉬움이 남는 바이지만 石井十次의 사회교육사상과 실천이 그의 유지를 받든 후대인들의 노력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부분이다.
이번 연구는 국제적으로 사회교육이 왕성하게 연구되고 실천되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아시아권의 사회교육사상을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일본의 사회교육을 다룸으로써 일본 사회교육사상의 원류를 보다 다각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우리나라의 학계에서는 당시 일본에 의해 이루어진 사회교육이 군국·제국주의 확장의 기제로 활용되었다는 인식으로 인해 사회교육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껄끄러움을 보여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연구를 통해 당시 피지배국이던 우리나라의 사회교육이 독립·구국적 성격과 더불어 사회구제적 성격을 함께 담고 있었던 것처럼, 지배국이던 일본의 사회교육 역시 그 원류에는 사회구제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연구는 사회복지와 사회교육과의 관련성에 주목한 연구라는 점에서도 의의를 갖는다.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격화 일로에 있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사회복지는 핵심적인 해결의 열쇠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 실천의 중심에서 사회교육은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요청받고 있다. 즉, 평생교육과는 별개의 개념으로 사회적 기능 중심의 사회교육만이 가질 수 있는 정체성과 방향성을 보다 명확히 함으로써 사회복지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능동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아울러 이에 대한 실천과 연구에 대한 고민이 활발히 이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는 사회교육법에 명시된 영역 중심의 사회교육과는 별개로 사회적 기능 중심의 사회교육에 대한 연구과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일례로서 현대사회의 사회복지적 관점에 주목하며 유럽권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소셜페다고지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연구와 실천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발맞추어 우리의 사회교육학계에서도 각 국가에서 다각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사회를 위한 사회교육의 기능, 구체적으로는 사회복지에 대한 사회교육의 역할 및 기능에 대한 학문적 관심과 연구가 보다 활발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회교육학의 발전을 통해 우리나라 사회교육의 정체성과 방향성은 명료해질 것이며 그 존재가치와 위상은 보다 굳건히 확립될 수 있을 것이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22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2S1A5B5A16053350).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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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속: 동의대학교 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연 락 처: mica.kim@gmail.com
연구분야: 사회교육사, 지역사회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