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of Lifelong Learning Society
[ Special ]
Journal of Lifelong Learning Society - Vol. 21, No. 4, pp.1-21
ISSN: 1738-0057 (Print) 2671-8332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Nov 2025
Received 11 Oct 2025 Revised 23 Oct 2025 Accepted 07 Nov 2025
DOI: https://doi.org/10.26857/JLLS.2025.11.21.4.1

인공지능의 활용과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 분석철학적 관점에서

박주병
강원대학교
Role of Teachers in the Age of Artificial Intelligence: An Analytic-philosophical Perspective
Ju-Byung Park
Kangwon National University

초록

이 연구의 목적은 인공지능을 교육에 활용하려는 흐름 속에서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검토하는 데 있다. 생성형 AI는 학생의 개별학습을 지원하고 교사의 업무를 경감해주는 여러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럴수록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가 학생의 지식을 깊이 있는 사고와 자기지식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사는, 첫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정보를 획득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마땅히 가져야 할 질문을 품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하며, 둘째, 학생의 지식이 사전에 주어진 목적에 활용되는 데 멈추지 않고 사고의 재연을 통해 유연성을 강화하도록 도와야 한다. 셋째, 교사는, 오우크쇼트의 표현을 빌면, 학생으로 하여금 모든 사태에서 모범을 찾는 경향성을 습관으로 갖도록 하는 존재다. 이렇게 마땅한 질문을 갖추도록 하고 사고를 재연하며 모범을 찾는 습관을 형성하는 일은, 사실을 일러주는 데에서 그칠 수밖에 없는 인공지능과 달리, 학생의 내면에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교육적 관계를 도모하는 인격적인 교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what the teacher’s act of teaching ought to aim for amid the expanding use of artificial intelligence in classroom instruction. Generative AI is expected to support individualized student learning and reduce the teacher workload; however, its use requires emphasis on the act of teaching functioning to ensure that student knowledge leads to deep thinking and self-knowledge. First, the teacher must aim to help students move beyond simply acquiring information to answer questions; students should also learn to formulate questions that are worth asking. Second, the teacher should guide students to elevate their knowledge from the level of serving predetermined purposes to that of fostering flexibility through the reenactment of thought. Third, in the words of M. Oakeshott, teachers, through the act of teaching, should help students form the habit of seeking exemplars in every situation. Such an endeavor cannot be fulfilled by AI, which is limited to presenting facts; it can be achieved only by teachers who personally attend to the inner life of individual students and sustain an educational relationship with them.

Keywords:

artificial intelligence, questioning, re-enactment of thinking, exemplification, teacher

키워드:

인공지능, 질문, 사고의 재연, 모범, 교사

Ⅰ. 서론

교사는 모범으로 자신을 내어준다.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가르친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음악론』 I, 6.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국수의 바둑 대국은, 예상을 뒤엎고 알파고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지만, 이후 모든 산업과 생활 영역에서, 그것도 동시에 파고든 인공지능(이하 AI)의 영향력은 앞으로 더 큰 충격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Chat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GAI) 서비스의 등장과 발전은 교육을 포함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혁신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AI 기술은 단순한 과학기술의 영역을 넘어 교육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핵심 도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교육에 도입하고 활용하게 될 때, 사람들은 크게 교육 내용의 변화, 방법의 혁신, 그리고 행정적인 측면의 지원에서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첫째, 교육 내용에 있어서, 급변하는 21세기 기술 환경(4차 산업혁명)에 적응하고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AI 리터러시, 컴퓨팅 사고력 등 새로운 역량을 학생들에게 길러주는 것이 시급하므로 AI 기술 자체를 교육 내용에 포함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정제영 외, 2023, p. 97 이하).

둘째, 교육 방법에 있어서 AI는 개인화된 학습 환경을 지원하여 학생 개개인의 수준이나 특성, 요구에 맞춘 학습 자료와 경로를 신속하게 생성 및 제공할 수 있다는 큰 강점을 가진다(Salih et al., 2025, p. 18 이하). 지난 달 중국 베이징에서 교육전문업체 유다오가 개발한 AI가 교사 임용고사를 통과하였는데, 업체 측은 “AI 교사의 가치는 학생들의 심층적인 사고를 함양하고, 개개인에게 맞춤형 학습을 해준다는 데에 있다”고 밝혔다(배경화, 2025). 우리나라에서도 AI·디지털 교과서를 도입을 추진하면서, 가상의 챗봇을 통해 24시간 학생과의 상호작용 및 즉각적 피드백이 가능하고 맞춤형 설계로 학생들의 학습 동기를 높이고 참여도 활성화할 수 있다고 홍보하였다.

셋째, 교실 운영이나 학교경영 등의 행정적 측면에서 인공지능은 학습 진단 및 분석, 평가 자동화 및 피드백 제공, 수업 계획 및 학습 콘텐츠 생성 등에서 AI 튜터나 AI 보조 교사 역할을 수행하여 교사의 업무를 경감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확보된 시간으로 교사는 학생 관리나 인간적 상호작용, 또는 고차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는 수업 설계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교육부, 2023a, p. 9 이하).

여러 찬반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공지능 기술의 도입과 활용은 앞으로 더 확대될 것이다. 인류의 기술발전에서 상호간(inter-)의 마주하는(-face) 접촉점을 가리키는 ‘인터페이스(interface)’는 도구의 성격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행위자의 활동에도 영향을 미쳐왔다. IBM의 DOS(Disk Operating System)은 일일이 명령어를 입력하면서 소프트웨어를 조작하고 하드웨어를 움직였지만,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탑재한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사의 윈도우즈(Windows)가 널리 쓰이면서, 사람들에게 컴퓨터는 마우스를 사용하여 클릭하는 함으로써 실행되는 장치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태블릿PC나 스마트폰은 손가락 등을 이용해서 화면에 직접 반응하는 방식이나 음성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고 앞으로 마우스조차도 구시대의 유물로 바뀔지 모르게 되었다. 이렇게 도구의 사용은 인간의 행위를 역으로 재규정하기도 하지고 심지어 대체하기도 한다. 주판이 계산의 보조도구일 때는 머릿속에 주판알을 움직이며 암산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 복잡한 계산을 머릿속으로 손수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에서 AI의 도입과 활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마저도 인공지능은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 교사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김진수·김종두, 2025: p. 28; 정제영 외, 2024: p. 34; 진성희·유민아·서경원, 2023: p. 1314). 이 연구의 질문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왜 대체할 수 없는가? 대체될 수 없다면 교사는 인공지능과 구분해서 어떤 역할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는가? 물론 교육이 모두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학습의 개념이 반드시 교수(teaching)의 개념을 가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지식이 발달할수록 일상의 삶에서는 그 필요성을 감지하기 어려운 지식의 학습이 필요하고 이런 지식의 학습에는 비형식 교육을 넘어서 전문적인 교사가 체계화된 교과를 통해 가르치는 행위가 요청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의 기술이 교육 분야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유도, 전통적으로 전문적인 교사의 독보적인 영역으로 보였던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양상에 충격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행위와 학생이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자신이 얻고자 하는 사실이나 결과를 얻어내는 행위 사이의 대조를 통해서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가 겨냥하는 지점을 환기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교사가 수행하는 가르치는 행위에 함의되어 있는 세 가지 요체인 ‘질문’, ‘사고’, ‘모범’의 개념을 중심으로 교사의 수업이 가진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는 학생이 모르는 것에 대한 단순한 정보나 대답을 전달하는 것(‘일러주는 일’)을 넘어 학생의 ‘지적 곤란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질문’을 스스로 갖도록 돕는 활동이다. 둘째, 학생이 스스로 품은 질문은 사고의 결과물인 규칙이나 원리를 활용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합리적 경험 속에 담긴 사고를 학생 자신의 마음속에서 다시 일으키는 ‘사고의 재연(再演)’에 쓰이는 것이다. 셋째, 사고를 재연한다는 것은, 재생한다거나 암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교사의 모범을 통해서 일체의 행위에서 모범을 찾는 경향성을 획득한다는 뜻이다. 교사는 명제로는 표현되지 않는 지식의 암묵적 차원인 ‘판단’을 자신의 스타일로 현시하는 모범으로서 학생 앞에 서는 존재이다. 이하에서는 이 세 가지 핵심 개념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대답을 일러주는 일과 질문을 가르치는 일

수업장면에서 학생이 인공지능을 활용할 때 가장 대표적으로 하는 행위는 소위 “프롬프트”(prompt)이다. 인공지능 플랫폼이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어놓을 수 있도록 하는 지시문, 명령문을 말한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자신의 결과물을 얻는 이 방식은 기존의 웹 서핑 방식의 정보 획득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검색어를 기반으로 찾아진 많은 자료 중에 자신이 원하는 자료를 선별하고 그 자료를 다시 자신의 힘으로 정리해야 했던 것과 달리 AI 기술의 발전은 지식의 정보 전달 측면에서 혁명적인 효율성을 제공한다. 방대한 데이터를 검토하고 분석하여 학생들의 질의에 훨씬 빠른 속도로 응답한다. 또한 유기체로서의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기억에 의존하는 경향, 심지어 경험과 편견에 따른 편향도 극복하고 최적의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공지능이 내어놓는 결과물들은 교사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는 많은 학생들의 질문에 일일이 대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효용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는 학생이 모르는 것을 일러주는 데에만 초점이 있지 않다. 이 점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소크라테스와 고르기아스가 가르치는 일을 보는 관점의 차이에도 시사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편 『고르기아스』의 서두에서 칼리클레스는 고르기아스가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말한다. “고르기아스는 그리스인들 가운데 원하는 누구에게든 묻고 싶은 모든 것에 대해서 질문하도록 기회를 주었고, 그가 대답해 주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Gorgias, 447c). 여기에 고르기아스 자신도 “게다가 여러 해동안 아무도 내게 새로운 질문을 한 적이 없다는 말을 덧붙이겠다”며 너스레를 한다. 그는 대중이 ‘가지고 있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연설을 통해 제시했고, 이것을 가르치는 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보는 교육은 달랐다. 오히려 학생이 아닌 교사가 질문을 가지고 있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질문을 던졌다. 그가 보기에 교육은 ‘학생이 마땅히 가져야 할 질문’을 가르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르기아스처럼 교육을 이해하면 학생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고 있고 이 무지상태를 해소하기 위해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교사에게 질문을 한다. 만약 가르치는 일이 이렇게 학생이 모르는 것에 대해 답을 일러주는 일이라면 교사는 AI를 결코 능가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교육의 실제를 들여다 보면,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양상이 이것만이 아니라 것을 알 수 있다. 수업의 사태에서 학생은 자신이 모른다는 느낌만 가지고 있을 뿐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조차 생각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학생의 지적 상태는 그가 쏟아낸 질문에 있는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수업이 끝난 다음, “질문 있는 사람 해보세요”라고 요구할 때 학생들이 머리를 쥐어짜서 마지 못해 던지는 질문은 대체로 이런 경우에 가깝다. 그런 질문들은 대체로 백과사전을 뒤적이거나 인터넷 자료를 검색해 보면 바로 답이 나오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대답의 구조가 교육의 전부라면 기억력이 AI에 못 미치는 인간 교사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달의 공전주기에 따라 조수간만의 차이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는 학생은 이 질문이 시험에 나오면 정답을 고를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다르게 답할 때에 그것이 틀렸다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무엇이냐, 그것을 아는 방법은 무엇이냐’라고 되물었을 때, 그 학생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선생님이 그렇다고 말해주셔서, 아니면 교과서에 그렇게 적혀있으니까? 아니면 AI가 그렇게 답을 했으니까’라고 답을 할 수밖에 없다.

반면 소크라테스가 보는 교육에서 질문과 대답, 교사의 일과 학생의 일은 역전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에 잘 그려져 있듯이, 질문을 던지는 쪽은 교사 소크라테스다. 『메논』에서 소크라테스와 노예 소년과의 대화, 소크라테스와 메논과의 대화에서 질문은 학생이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교사에 의해서 학생에게 주어진다.

이러한 예는 오늘날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끓는 주전자에서 소리가 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학생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이 질문의 답이 아니라, 도대체 이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그래서 어째서 그런 답이 나오게 되는가 등, 이 질문 자체이다.

교사가 수업에서 질문을 가르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살펴보기 위해서 “주제에 관한 질문”과 “사고에 관한 질문”의 구분을 검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이하 홍윤경, 1994). 일상적인 맥락에서 질문을 던지고 몰랐던 대답을 얻는 것은 주제에 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의 원천은 권위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때 유념해야 할 것은, 이 권위가, 오랫동안 학생을 가르쳐온 교수자로서의 교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권위가 아니라, 확실한 정보원이라면 누구라도 가질 수 있다는 그런 의미에서 권위를 뜻한다는 점이다.

주제에 관한 질문은 “몽블랑 산의 높이가 얼마인가”와 같이 정확히 답을 알지 못해도 질문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대답을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홍윤경, 1994). 반면 교사가 주목하는 ‘사고에 관한 질문’은 끓는 주전자에서는 왜 소리가 나는가라는 질문이 불러일으킬 학생의 사고, 즉 물체는 분자로 이루어져 있고, 이 분자는 온도에 따라 팽창한다거나, 분자의 팽창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배경지식들은 그저 정답을 알아냈다는 데에 그치지 않고 도대체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열쇠가 있다. 이 점에서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는 학생의 질문을 해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지적 곤란상태가 무엇인지를 학습하게 된 노예소년의 입장은 고르기아스가 가르치는 학생의 입장과는 대조된다. 고르기아스에게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많은 지혜를 갖춘 고르기아스가 정답을 가르쳐줄 것이므로 학생은 답을 알기 위한 별도의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대화하고 있는 노예소년은 자신의 지적 곤란상태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지적 곤란상태를 해소하는 것 역시 자신의 몫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 말은 노예소년이 다른 사람의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흔자의 힘으로 자신의 지적 곤란상태를 해소하려고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노예소년이 반드시 스스로 인식한 자신의 지적 곤란상태에 비추어서만 기하학의 정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홍윤경, 1994, p. 31).

인공지능을 교육에 활용할 때 학생들이 교사의 도움없이도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일견 학생의 능동적 학습에 효과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는 질문을 가르치는 것이며, 이때 교사가 가져오는 질문은 학생 스스로 지적 곤란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질문이다. 오히려 인공지능을 통해 겉으로 보기에 적극적으로 학습하는 것처럼 보여도 학생의 노력이 정보를 획득하는 데 초점을 맞출 때, 그 질문은 “주제에 관한 질문”에 머무르고 만다. 이러한 경우, 학생은 여전히 정답의 원천으로서의 권위에 의존하게 되며 주어진 질문에 대한 정답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지적으로 수동적인 상태에 놓일지도 모른다.

이에 비해서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는 학생의 지적 곤란 상태를 자각하도록 다각도의 질문을 던지고 이해 여부를 확인한다. 가령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연산이기도 한 분수의 나눗셈을 가르치는 교사는, 학생들이 AI를 따라서 연산 과정을 보기에 앞서 분명히 곱셈과 나눗셈의 관계, 분수의 의미, 이미 수를 나눈다는 개념이 들어있는 분수를 다시 나눈다는 것이 가진 수리적 의미 등을 질문할 것이다. 이때 교사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학생의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는 이해의 결과로 끊임없이 새로운 미지를 이해하는 수학적 모험에 뛰어드는, 가지계(intelligible world)의 거주자가 될 것이다(Oakeshott, 1979, p. 23 이하). 학생의 사고가 능동성을 띠는 경우는 이렇게 자신이 이해한 바를 통해서 모르는 것을 품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타인의 의견이나 권위에 의해서 나에게 경험된 사실들이 참으로 이해한 것이 되려면, 과연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근거에 의해서 알고 있는지를 검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검사는, 나의 경험, 나의 기억을 다시 소환하되, 단지 ‘나’를 반추할 뿐만 아니라 내가 가진 생각을 합리성, 공적 차원의 토대 위에 놓고 검사하는 작업을 병행하게 된다(박주병, 2019, p. 76). 나의 감정과 생각을,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사실을, 타인도 이해가능한 시각에서 재검토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자기지식으로 바꿈으로써 타인에게도 전달가능한 객관성을 얻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노예 소년에게 질문을 던진 후 “자신은 질문만 했을 뿐 가르치지 않았다”고 말한 역설에는, 가르치는 일은 정보의 취득뿐만이 아니라 질문을 가르치는 일에 있음을 시사한다. 이 목적을 위해 교사가 해야 할 일은 교사가 내어주는 질문을 학생 자신의 질문으로 삼을 수 있도록 배경지식, 지식들간의 탄탄한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사태라면, 설사 학생이 가만히 수업 중에 앉아 있더라도 교사가 제기하는 질문이 도대체 어떤 질문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매우 적극적인 상태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교사가 보는 것을 같이 보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교사가 아이들에게 기울이는 교육적 관심은 단순한 정서적 애착에서 비롯된 관심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다. 교육의 역사 이래로 교사의 질문은, 학생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겨냥한 질문, 그리하여 학생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반추하도록 도와주는 질문이었다. 이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질문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AI가 정보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학생의 지적 고투(지적 노력과 탐구)를 대체하거나 회피하게 할 위험이 있는 시대에, 학생이 자신의 지적 곤란 상태를 인식하고 지식을 자기 것으로 공고히 하도록 이끄는 과업은 여전히 교사를 통할 수밖에 없다.


Ⅲ. 사고한 결과물의 활용과 사고의 재연

AI 기술이 교육에 도입되면서 나타나는 또 한 가지 기대는 학생들이 자신이 원하는 학습 상의 문제를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학생의 요구에 응답하는 결과물을 내어놓음으로써 문제 해결 능력을 향상시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AI의 도입이 전통적인 암기식 교육에서 벗어나 오히려 학생으로 하여금 비판적 사고를 도모하도록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학생이 AI의 도움을 받아 문제의 답이나 해결 공식을 얻었을 때, 이때 이루어지는 사고는 온전히 학생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AI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학생이 가져온 질문을 프롬프트에 입력하면 관련된 자료를 신속하게 처리하여 정리된 정보를 산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대답은 곧 그 지식 영역에서의 사고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학생이 AI의 결과를 활용할 때, 그 과정에서 동원되는 사고는, 일차적으로는 인공지능이 빅데이터를 통해 학습하고 구조화한 사고의 결과물이다. 그것이 학생 자신의 사고가 되기 위해서는 학생 스스로 적어도 AI가 내어놓은 결과물이 가진 의미를, 즉 그 결과물이 흡족하다면 어떤 근거에서 그렇고, 다시 프롬프트를 넣어 자신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기까지 AI를 ‘추궁’한다면 어떤 근거에서 그래야 하는지를 스스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사가 AI를 활용할 때, 학생이 AI의 도움을 받아 학습을 하도록 할 때, 이렇게 학생 자신의 사고가 되도록 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역사학자 콜링우드(R. G. Collingwood)는 역사가의 과업이 인간의 마음에 대한 탐구로서의 자기지식에 있다고 말한다(Collingwood, 1979, p. 207). 역사가 인간의 마음에 대한 탐구인 이유는 과거 행위자들이 남긴 유물과 기록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 사고를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고영준, 2016, p. 40).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로, 학생들에게 일차방정식의 원리를 가르치는 일은 과거 수학자들이 그 원리를 떠올리면서 했던 사고를 학생들이 자신의 사고로 재연(re-enactment)하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김안중, 2023, p. 122).

예컨대 아르키메데스의 부력의 원리, 물의 전기분해 실험, 맹자의 사단설, 유클리드 기하학의 제5공리(평행의 공리)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 학생은 그 법칙을 정립한 사람의 사고를 ‘재연’해야 한이다. 사고를 재연한다는 것은, 그 사고에 얹힌 감정, 그 사고를 일으킨 정황 등의 비매개적 요소-개념에 의해서 전달될 수 없는 비보편적인, 즉 특수요소들-를 제외하고, 전달가능한 매개적 요소를 학생의 마음 속에서 스스로 일으킨다는 뜻이다. 부력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아르키메데스와 똑같이 발가벗고 거리로 뛰쳐나갈 필요는 없다. 그것은 아르키메데스의 사고에 우연적인 요소인 비매개적 요소일 뿐이다. 다만 학생은 자신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맞닥뜨린 경험이 아르키메데스의 경험과 동일한 것이 되도록 용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용해란, 학생이 살고있는 시공간, 학생의 심리적 상태 등, 여러 가지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딛고 자신이 이해하고자 하는 사고를 처음 가졌던 탐구자의 문제의식과 과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기하학은 점과 선과 면과 입체를 사고를 통해서 자유롭게 이동시킬 수 있을 때 가능하며, 대수적 사고는 등호 양쪽에 수의 관념을 자유롭게 조작시킬 때 가능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학생은, 교사의 언행이나 자신의 체험을, 그저 마침표가 찍힌 닫히고 굳어버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문제 하나 풀었거나, 신기한 이야기를 들은 것에 그칠 뿐이다. 즉 학생 자신의 힘으로 사고를 재연하지 못하고 일회적 경험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고를 재연한다는 것은, 학생이 보편자(개념, 법칙, 원리 등)를 갖추기 위해서 과거를 현재에서 실현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거의 모든 교수-학습 상황은 역사가가 수행하는 사고, 즉 과거를 현재에서 복원하는 것과 동일한 패턴을 갖게 되며, 그래서 교육내용은 하나같이 복고적일 수밖에 없다. 수업을 통해서 겨냥하는 재연될 사고란, 개념상 선대로부터 이어져온 과거의 사고(검증된 사고로서 매개가능한 사고)이기 때문이다.

교육을 가리켜 ‘사고의 재연’이라고 규정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있었던 ‘과거의’ 사고만을 교육이 다루고 있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마도 이 점 때문에 사람들 중에는 이 규정에 대하여 반론을 가지게 될 사람이 많으리라 예상되지만, 그러나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수록 교육이 ‘과거의’ 사고만을 다룬다는 말은 옳은 말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교육을 ‘사고의 재연’이라는 시각에서 보기 시작한다면, 교육이라는 개념의 의미 속에는 필연적으로 ‘과거’라는 기준이 붙박혀 들어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기준이 어떤 기준인가를 말하겠다. 우선, 일상적인 맥락에서 ‘과거’라는 것은 항상 멀리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그것이 학문이나 지식과 관련된 것일 경우, 요즘처럼 새로운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시대에 수백년, 아니 수천년 전의 낡아빠진 지식이 무슨 배울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이 과거를 ‘멀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순전히 시간적인 거리와, 그 거리를 메꾸어줄 수 있는 인간의 기억력의 짧음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참으로 기억의 대상으로서의 과거라는 것은 한없이 멀리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으로서 과거를 본다면, 그것은 그다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기억이 심리학적 개념-인간의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개념-임에 비해서 이해는 논리적인 개념이다. 이 점은 이미 앞에서 말한 ‘사고는 영원하다’는 명제의 의미에서 자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교육이 과거의 사고를 가르치는 일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우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아무런 ‘현실성’이 없는, 것들만 ‘가르치는’, 기억하도록 하는, 일이라는 생각은 옳은 생각이라 할 수 없다(김안중, 2003, p. 118).

이러한 사고의 재연은, 다시 말하지만 단순히 과거의 사실들을 암기하거나 복각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고의 재연에서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지식을 활용하고자 할 때에 기대하는 시간의 방향과 다르게 흐른다. 지식을 실생활에 이용하고자 할 때, 통상 우리는 자신이 이해한 현재의 사태를, 마땅히 되어야 할 미래와 목적의 개념 아래 연결하는 목적론적 관점을 취한다. 인간은 학습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목적론적, 실제적 사고방식에서도 학습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사고방식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이미 학습한 것을 활용하는 데에 그친다. 목적에 의해서 부추겨진 사고이므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사고 전체의 반성으로 파급되지 않는다.

반면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과거의 사고(검증된 사고로서 매개가능한 사고)를 현재의 학생 마음에 다시 일으키는 ‘사고의 재연’에서 사고의 방향은 이해를 위해 시간을 넘나든다. 이때 재연되는 사고는, 위의 인용문에서도 나와 있듯이 기억(記憶)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理解)의 대상이다. 사람들이 과거를 멀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간적 거리와 인간의 짧은 기억력 때문이지만 기억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으로서 과거를 본다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김안중, 2023, p. 124). 재연해 볼 가치가 있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라면 학생은 과거→현재의 방향이 아니라, 거꾸로 현재→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적 노력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고의 시간이동은 두 가지 교육적 효력을 갖는다.

첫째, 사고의 재연을 위해 과거를 마음에 소환하는 일은 자기검사, 자기지식을 가능하게 한다. 눈앞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 목도한 사물에 대하여 모종의 인상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인상 자체는 반성적 검사를 거치지 않으면 결코 그의 지식을 확장시키지 못한다. 학생 자신의 사고가 되려면, 학생이 의심 없이 권위에 의존하여 받아들이고 있던 사실을, 교사의 질문과 논박을 통해서 곤란감과 당혹감(아포리아, aporia)의 상태에 빠뜨려야 하는 것이다(박주병, 2013, p. 442). 매우 단편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지각과 식별(예컨대 ‘저 잎이 녹색이다’)이 일어날 때조차 우리는 사고와 무관한 날것의 경험을 그대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 추론, 반성, 사고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서 사고의 형식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인지도 모르는 불확정적인 의식이 있다고 말하는 셈인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고를 재연한다는 것은 내가 사용하고 있는 관념의 검사, 사고와의 관련 아래 자신의 인상과 지각을 재조명하는 일이다.

자신을 검사한다는 표현에 이미 들어있듯이 자신이 하는 활동을 다시 내려보는 자아는 비유적으로 훨씬 높은 차원의 시야를 확보한다. 마치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위치를 가장 잘 조감하려면 높은 시야를 얻을 수 있는 정상에 올라가야 하듯이, 한정된 관점과 목적의식 아래 분석하고 추론하고 종합하는 활동이 조망할 수 있으려면 그 활동을 초월하는 조감적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시야를 확보하게 되면 학생은 이제까지 했던 세세한 경험들과 지금 겪고 있는 경험이 오늘 처음 등장하는 새로운 사건이나 우연적 발생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미리 나의 이해를 위해서 설계해 놓은 교육과정(curriculum)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지적 자극을 교육과 성장의 계기로 받아들이는 셈이다. 이런 가정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이 이제까지 했던 경험을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경험과 연결하려 애쓸 필요도 없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더 높은 지적 정신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도 할 수 없게 된다.

둘째, 사고의 재연은, 통상적인 목적론적 사고방식에서 기대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창의성을 가져다준다. 흔히 우리는 해결해야 할 문제사태라는 실제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지식, 기술, 도구 등을 수단으로 활용하여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목적론적 사고방식에서 지식의 학습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집중한 나머지 자칫 학습자의 이해는 도외시하고 넘어갈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문제사태의 해결에 지식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꼭 “나의” 지식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사고의 재연은 사고를 활용하기에 앞서 사고의 충분한 이해를 도모한다. 그리고 이렇게 사고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일은 교육의 안쪽에 집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AI의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전통적인 교육이 가진 경직성을 성토하지만, 사고의 재연에 힘써온 교육의 전통은 그런 비판론자에게도 사고의 힘을 만들어 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저런 다양한 사실을 이해한 학생이, 어느 순간, 그 확정된 사실, 이해된 법칙들을 다시 풀어헤쳐서 새로운 사고체계로 만들어낸다면, 그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학생은 사고의 재연을 통해 일회성 경험을 원리나 법칙으로, 그리고 다시 자신의 마음 전체를 새로운 체계로 용해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창조경제라든가 창의인성이라는 말을 써서 오염시키는 창의력의 사태는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동원 가능한 수단을 찾아보려는 공학적 사고의 표현들이다. 이것도 창의력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곧 고갈되어버리는 창의력이다. 왜냐하면 이런 의미의 창의력은, 목적이 주어지지 않는 한 발휘될 수 없고, 목적의 폐쇄성을 딛고 새로운 목적을 자신에게 표상할 수 없다. 목적이 달성되면 곧 휴지기에 접어드는 이런 의미의 창의력은 마음 전체가 스스로 재탄생하기 위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다시 용해시키는 마음 전체의 창의력, 창의력 그 자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좁은 의미이다. 물론 실제적 사고에도 상당한 정도로 지적 작용이 일어난다. 문제를 설정하고 관련된 해법들을 추론하고 그것을 하나의 설계도로 종합하는 등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지 않고서는 AI에게 적절한 프롬프트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에서 학생이 아무리 적극적, 능동적으로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그것은 대상의 일면, 특수한 관심과 목적의식에 종속된 한 측면일 뿐이다. 단편적인 호기심이나 모종의 불편함 때문에 관심을 기울이고 기술을 발휘하기 때문에, 그 결핍이 채워지면 그것으로 끝이고, 그 충족이 학생의 진정한 마음의 성장을 가져온다는 보장을 하기 어렵다.

나아가 이런 실제적 필요는 각자에게 긴급한 문제일 뿐, 다른 사람에게는 부차적이거나 관심사가 아니므로 교과로 성립하기 어렵다. 학교의 교과는 각자의 유동적인 필요가 아닌 공통의 인간조건으로부터 나오는 의무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유용성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은 주체성(당사자가 되어야 할 이유)을 가질 수 없다. 경제적 여유가 된다면 다른 전문가나 기술자가 그 문제를 해결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해만이 내가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주체성을 요구한다.

학생이 교사의 수업을 통해서 접하는 지식이나 AI를 통해서 해결을 도모하는 문제 등, 학교에서 수행하는 낱낱의 경험과 활동이 진정한 성장이 되려면, 전체로서의 마음의 질서에 재편되어야 하고, 나아가서 한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온 인류의 지적 노력을 가설적으로 상정한 경험 세계 전체(이것이 소위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에서 그 자리를 잡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학습을 위한 인간의 활동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를 위한 목적 밖에는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삶의 당면한 문제사태를 해결하거나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취를 위해서 지식을 얻는 것이 학습의 목적이 아니라, 학습을 하는 당사자와 그가 속한 인류 전체의 성장과 발달에 그 성과를 계속해서 재투자하는 것이 학습의 목적이다(박주병, 2013, p. 36).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 가르치는 내용이 단편적으로 쪼개지거나 폐쇄된 양태에 머물지 않고 다른 지적 활동과 융화되고 체계를 이루도록 다각도로 질문을 던지고 새롭게 조망하는 것이. 이 일을 통해서 교사는 학생이 새로운 지평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리고 지식과 그 지식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이 단편적인 목적의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가치있다는 태도를 가지고 세계를 향유하게끔 안내하는 것이다.

요컨대, AI 기술을 활용하면 학생은 자신이 원하는 문제를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다. 이때 사고는 누가 하는 것인가? 학생이 하는 사고의 성격은 무엇인가? AI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교육에서 학생은 자신이 떠올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AI의 도움을 받지만, 그 문제해결과정에서 동원되는 사고는 본인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콜링우드의 사고의 재연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교육에서는 무엇보다 선대로부터 내려온 사고를 자신의 힘으로 재연하는 일이 중요하다. 사고를 재연하는 일은 정보의 더미나 사실의 집합체로서가 아니라 사고하는 능력으로서 사고를 용해시키는 일이다. 교사의 역할은 이렇게 사고의 결과물을 학생이 손에 쥐는 법을 일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도록 하는 데 있다.


Ⅳ. 모범에 의한 모범의 학습

생성형 AI에게 보고서를 요약해달라고 하거나 번역을 지시하여 얻어내는 결과는 대부분 전문가적 솜씨를 발휘해서 학습자가 스스로 한 것보다 더 뛰어난 편이다. 멀티모달 AI의 경우 전문화가가 그린 듯한 그림을 흉내내기도 하고 학습자가 긴 시간을 들여야만 배울 수 있는 그래픽 기술을 발휘하여 화면 편집이나 영상을 제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렇게 AI가 내어놓은 결과물을 두고 “사람이 한 것보다 더 낫다”는 표현을 할 때에 역설이 감춰져 있다. AI의 작업수행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우리가 AI에 존경을 표현한다거나 그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 학습에 뛰어들겠다는 동기를 불러일으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면 교사의 가르침이 학생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이유는 학생의 존경을 가져오는 모범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교육철학자 오우크쇼트(Michael Oakeshott)는 잘 알려진 ‘정보’와 ‘판단’의 구분, 더 정확히는 ‘정보의 전달’(instructing of information)과 ‘판단의 전수’(imparting of judgement)를 구분하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교사의 모범이 가진 중요성을 설파한다.

“사람들 중에는 ‘모범에 의한 가르침’ 하면 무엇인가 열등한 종류의 교수유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지만,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다. ⋯ 모범에 의한 가르침은 학생이 구체적 상황을 대면하게 만듦으로써 규칙들로부터 얻게 되는 ‘절반의 지식’으로부터 해방되게 해준다. 학생들이 모범을 흉내냄으로써 얻게 되는 것은 그냥 특수한 사례의 모범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모든 것을 모범이 적용되어야 하는 사례로서 보는 경향성이다. 이 경향성은 모든 발화 속에서 작용하는 개별적 지식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과 같은 것으로서 학생은 이 습관을 가지고 있는 교사를 모방함으로써 자신도 이 습관을 얻게 된다. 지성의 훌륭함이란 오직 지적인 훌륭함 그 자체를 목적으로 알고 그것을 자랑으로 말하지 않는 교사에 의해서만 전수될 수 있다. 오리 떼가 비상하는 까닭은 그 우두머리 소리 때문이 아니라 우두머리가 먼저 비상하기 때문이다”(Oakeshott, 1989, p. 62).

마지막 인용된, “오리 떼가 비상하는 까닭”도 유명하지만, 이 비유보다 더 주목해야 할 대목은, 교사의 모범으로써 제시되는 가르침이 두 가지 혜택을 제공한다는 분석이다.

첫째, 모범은 “학생이 구체적 상황을 대면하게 만듦으로써 규칙들로부터 얻게 되는 ‘절반의 지식’으로부터 해방을 얻게 해준다”. ‘절반의 지식’이 가진 의미는 정보와 판단의 구분을 통해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러 연구에서 소개되었듯이, “학습과 교수(Learning and Teaching)”에서 지식의 두 가지 구성요소는 ‘정보’(information)와 ‘판단’(judgement)으로 이루어졌다. 비유하자면, 건축의 외양과 그 외양이 구성하는 공간 사이의 관련과 유사하다. 오우크쇼트가 정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비교적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다. 그것은 “지식의 표면에 드러나 있는 부분, 항목으로 열거할 수 있는 부분”이며, 우리가 ‘보통 사전이라든가 편람, 교과서, 백과사전 등에서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얼마동안, 얼마만큼 등의 질문에 대한 대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들을 발견하게 될 때의 그것’(Oakeshott, 1989: p. 51 이하)이다. 그에 비해 ‘판단’은 ‘지식의 묵시적 부분, 즉 지식의 밑바닥에 들어 있어서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는 부분’을 가리킨다. 정보가 명제로 언어화할 수 있음에 비해서 판단은 그것이 원칙상 불가능한 요소이다. 어떤 규칙의 형태로 드러나지도 않고, 따라서 판단을 정보로 환원한다든가, 항목으로 열거한다든가 하는 일도 불가능하다(Oakeshott, 1989: p. 52 이하).

여기서 ‘정보’는 그것만으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한다든지, 만든다든지, 이해한다든지, 설명한다든지 하는 능력을 담보하지 않는다. 우리는 내가 가진 정보를 매우 통찰력있게 때로는 시적으로 우아하게 활용하는 사람을 만나서 감탄하기도 하지만, 거꾸로 엉뚱하게 정보를 이해하고 사용해서 실소를 머금게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 정보를 구체적으로 사용하고, 정보의 의미를 해석하고, 정보의 해당 여부를 판단하고, 적절한 규칙을 식별하고, 그 규칙의 범위 내에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지식의 요소(즉, 판단)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조화태·박주병·권영민, 2024, p. 198). 오우크쇼트가 ‘판단’을 가리켜 ‘사고의 능력’이라고도 하고, ‘스타일’, ‘지성’, ‘마음’이라고도 하는 것은 판단이 주어진 정보를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새롭게 산출하기도 마음의 작용이자 마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학생이 정보가 가진 ‘절반의 지식’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은 교사가 정보를 일러주는 일에는 반드시 ‘정보의 적절성을 판단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구체적 사태에 적용하는 능력’으로서의 교사의 판단이 함께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학생은 교사를 흉내냄으로써, 한 가지 모범을 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모범이 적용되어야 하는 사례”로 보는 지적 습관을 얻게 된다. 일체의 사태, 모든 인간 활동을 모범이 적용되어야 하는 사례로서 본다는 것은 학생 앞에 놓인 과학적 사실, 역사적 사건들에서 선대의 위인들이 끌어올려놓은 지적·도덕적 수위를 감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습관은 지력을 다해 세계를 이해하는 일에서도, 선한 마음을 담아 도덕적 행위로 실천할 때에도, 어쩌다가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모범이 될 수 있게끔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수업 시간을 통해서 교사가 전해주는 역사상의 놀라운 지적 성취를 접하면서 학생은 일상에서 접하지 못한 신기한 사실들, 유용한 정보들을 취득할 뿐만 아니라 지식의 아름다움, 곧 지성의 미덕을 알아보고 향유하게 된다(Oakeshott, 1989, p. 61). 편견 없는 호기심, 인내심, 지적 정직성, 정확성, 근면 등이 포함된다. 아닌 게 아니라 학교에서 학생이 교사로부터 감지하는 것은, 마리 퀴리 부인이 방사선을 발견했다는 과학사적 사실이 아니라, 자신과 그의 딸도 방사능 피폭에 의한 백혈병으로 사망에 이르렀던 것처럼, 인류의 위대한 과학자들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바친 지적 정열이다. 이렇게 모든 지적 활동에는 활동에 몸담고 있는 사람만이 보여주는 고유의 스타일(style) 또는 개성적 표현방식이 들어 있다(Oakeshott, 1989, p. 56). 이 스타일은 정보나 규칙으로 규정되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학생들 앞에서 정보의 전달과 함께 전수되는 교사의 판단으로써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느끼고 사고할 줄 아는 능력, 정보 이외에 우리가 학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문명유산의 진짜 알맹이는 바로 이 능력 자체이지, 이 능력 덕택으로 만들어진 산물들의 죽어버린 시체가 아니다. 이 죽어버린 시체들은 학습되지 않고도 전승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능력 자체는 오직 학습됨으로써만 전승된다. 이것이 바로 교사가 자기 학생에게 ‘전수’해야 할 내용이며, 교사는 자기가 선택한 정보 - 그것이 무엇이든 - 를 통해서 이것을 자기 학생에게 가르치는 사람이다(Oakeshott, 1989, p. 61).

AI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문제나 궁금증을 교사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프롬프트에 대한 최적의 정보를 즉각적으로 제공한다.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가 이런 측면에서라면 지식 전달자로서의 교사의 역할은 애매해지거나, 심지어 불필요한 존재처럼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AI가 방대한 데이터에서 빠르게 대답을 찾아낼지라도, AI가 쏟아내는 다양한 결과물 중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더 나은지를 배우는 것은 AI 그 자체가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AI는 자신이 내놓은 결과물에 책임을 질 수 없다. 가령 어떤 학생이 최근 메타(Meta)에서 내놓은 스마트 글래스(Smart Glass)를 착용하고 수학 시험 문제를 풀었는데 그 답이 틀렸을 경우, 응시자가 자신이 아닌 메타(社) 탓을 할 수 있겠는가? 미국출판물협회나 미국심리학회에서 AI를 활용한 저작물에 저자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 것(APA, 2025)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지금까지–그리고 앞으로도- 인공지능에 행위자성(agency)을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AI의 작동은, 비록 인간이 놀랄 정도로 탁월한 결과물을 내어놓을지라도, 또는 인간의 흉내를 내어 인간인지 아닌지를 구분해야 할 지경이 될지라도,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고 설득할 책임있는 행위주체를 가정할 수 없다. 이점은 교육에서 활용되는 AI의 경우에 더욱 분명하게 설정될 수밖에 없다. AI는 아무리 완성된 기술적 구현을 하더라도, 구체적인 학생을 앞에 두고 왜 그렇게 가르치는지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격적 주체로 논리상 상정할 수 없다. 반면에 교사의 행위가 그 자체로 학생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는, 학생 앞에서 보여주는 교사의 실천이 교사가 이제까지 배워온 인류의 지적·도덕적 수준을 자신만의 스타일과 개성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Ⅴ. 결론

이 글은, 교육에서 AI의 기술이 교사의 역할과 어떻게 공존할지 의문이 되고 있는 인공지능 시대, ‘가르치다’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핵심인, ‘질문’, ‘사고’, 그리고 ‘모범’에 비추어, 교사의 위치와 역할을 재고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AI가 교사의 역할을 대체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정작 교사 본연의 역할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수업과 별개인 상담이나 학생지도와 같은 영역에서 교사의 역할을 찾음으로써 이 문제를 비껴가기도 한다. 물론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 가르치다는 동사는 수업 외에도 다양하게 적용되지만, 교사의 일차적인 과업은 교과를 가르치는 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질문, 사고, 모범을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검토한 데에도 교사가 수업 장면에서 하는 독보적인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검토한 바에 따르면, 교사는 학생이 들고 오는 질문에 대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마땅히 가져야 할 질문을 갖도록 하는 데 있다. 가르친다는 행위는 학생이 현재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상태, 즉 교육 내용과 관련하여 마땅히 가져야 할 지적 곤란상태를 인식하고 이를 스스로 해소하도록 돕는다. 오히려 교사 편에서 제기하는 질문들은 학생이 모르는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학생 자신의 사고(思考)를 성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교사의 가르치는 일이 곧 질문을 가르치는 일이기 때문에 학생은 지식을 고정된 정보의 집합체로서 배우기보다 재연할 사고로서, 자신의 판단의 힘이 될 능력으로서 배우게 된다. 교사가 인간인 한, 학생 앞에서 말하고 보여주는 행위의 이면에는 사고가 들어 있고, 이 사고는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검증된 사고(원리, 법칙 등)이다. 학생은 이 사고를 자신의 마음속에 다시 일으키는 사고의 재연 과정을 통해 자기지식의 차원을 마주하게 된다. AI가 제시하는 빠르면서도 그럴 듯한 대답들은, 학생이 자신의 힘으로 사고를 재연해보려는 지적 고투를 회피하도록 함으로써 정보가 가진 불활성을 고스란히 남겨 두게 된다.

아울러 교사는 자신의 행위를 모범으로 제시함으로써 학생이 모든 일에서 모범을 찾는 경향성을 획득하도록 한다. 판단은 오직 교사의 어조, 제스처, 모범 사례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수될 수밖에 없다. 학생은 교사의 모범을 모방함으로써, 특수한 한 사례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모든 것을 모범이 적용되어야 하는 사례로서 보려고 하는 경향성을 획득하게 되며, 이는 곧 지식의 아름다움이자 지성의 미덕을 학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공지능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테크놀로지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마 무척 빠른 속도로 AI는 교육의 장면 곳곳에서 쓰일 것이다. 앞서 인용했던 장강명은 본업이 소설가인 만큼 『먼저 온 미래』의 전반부 “오만과 편견, 그리고 창의성”이라는 장(章)에서 “기계는 과연 창의성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다룬다. 알파고와의 대국이 있기 전까지 바둑판은 체스 이상의 무궁무진한 수가 펼쳐지는 장이어서 기계는 결코 인간의 창의성을 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프로기사들이 알파고를 창의적이라고 평가했다(장강명, 2025, p. 43). 역설적으로 바둑에서 알파고가 보여준 창의성은 승부로서의 바둑의 본질에 “가장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었다. 인간 기사들은 오히려 기풍이라든가 저만의 습관이라든가 하는 것에 영향을 받았지만 인공지능의 바둑은 집을 만들고 승부에서 유리한 수를 두는 기본에 너무나도 충실했다.

이세돌-알파고 2국을 해설하면서 알파고의 바둑에 대하여 “한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창의적인 수들이 많다”라고 평가했던 이희성 9단은 자신의 의견을 수정했다. ⋯ “인간 기사들에게는 다양한 기풍이 있었쟎아요. 저조차도 남들과 똑같은 포석을 두기 싫어서 저만의 포석을 만들었거든요. ⋯ 그런 게 창의적인 것 같아요. 인공지능이 두는 수들은 그냥 정답에 가까운 수죠.”(장강명, 2025, p. 46).

만약 교육이라는 인간 영위도 바둑과 같이 목적이 뚜렷한 활동이라면 결국 인공지능이 교사의 능력을 일부 뛰어넘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인간의 한 가지 특수한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활동에 편재되어 나타나는 메타적 활동인 만큼, 한 가지 특수한 활동에서의 성공만으로 그 성취를 재단할 수 없다. 아울러 인간의 전인적 성장이란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는 일직선의 과정이 아니라 문명을 이루는 온갖 복잡다단한 요소들을 탐색하는 모험과도 같다. 교육과 인간의 특성이 이러하다면, “가장 기본에 충실한” 경우라는 것을 상정할 수 없다. 비록 교육은 교사가 가진(그리고 학생이 가진) 인간적 습관이라든가 저마다의 개성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활동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에서 인공지능의 미래는 어떠할 것인가? 이 질문을 숙고할 때 벨기에 교육철학자 마스켈라인과 시몬(Masschelein & Simmons, 2020)이 학교에서의 테크놀로지에 대해 내린 정의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고대로부터 이어져내려온 스콜레(schole)의 개념을 바탕으로 학교 교육을 변호하면서 테크놀로지의 의미를 이렇게 규정한다. 학교에서의 테크놀로지는 통상적인 의미처럼 “생산의 세계에서 자연과 인간을 정복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학생이 “흥미롭게 공부하고 연습하는 데 몰두하는 경험을 위한” 것(p. 85)이어야 한다. AI는 놀라운 테크놀로지이긴 하지만, 교사가 수업을 하는 이유는, 학생이 신기한 기술에 감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배움을 계속해서 추구하는 활동이 가져다 주는 경이를 만끽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발전시킨 세계에 대한 이해, 자신에 대한 이해는, 교사가 던지는 질문을 통해서, 교사가 재연하고자 하는 사고를 통해서 아이가 도저히 상상도 못하던 세계로 안내한다. 학생이 아침저녁으로 마시던 물을 분해하면 수소와 산소라는 기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자연수의 집합도 무한이고 실수의 집합도 똑같이 무한이지만 어느 것이 수리적으로 더 큰 집합인지를 묻게 되는 일, 저 먼 우주에서 우리 은하계조차 아주 작은 먼지에 불과할 뿐이며, 그런 우주가 지금도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다는 가설 등. 교사가 학생과 하는 상호작용은 이런 지적 탐험에 몰두하기 위한 경험을 위한 것이며, AI라는 기술적 지원 역시 이 지적 탐험을 위해 사용될 것이다.

나는 어네스크 바커 경이 그의 자서전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살던 오두막집을 나가면 내가 다니던 학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학교가 있는 한 나에게는 모든 것이 있었다.” ⋯ 잉크 묻은 손으로 책가방을 열고 숙제를 하려고 할 때 그 아이는 삼천 년 동안 인간의 지적 모험이 겪은 온갖 행운과 불운을 마주 대하는 것이었다. 욥이 겪은 고난, 달빛을 가르며 소리 없이 테네도스를 떠나는 선박, 셰익스피어와 라신느의 희곡이 보여주는 인간 조건의 공포와 착종과 연민, 또는 물의 화학적 성분 등등이⋯(Oakeshott, 1989, p.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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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 정 보
박 주 병 Park, Ju-Byung

소   속: 강원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연 락 처: theogeo@kangwon.ac.kr

연구분야: 교육철학, 도덕교육, 인간행위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