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인학습자의 존재론적 전환에 관한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 비서에서 연구자로의 이행 과정을 중심으로
초록
본 연구는 비서 경력을 지닌 성인학습자가 연구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존재론적 전환을 탐색하는 데 목적이 있다.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 방법을 적용하였으며, Illeris 학습 이론을 분석 틀로 삼아 2016년부터 2026년 3월까지 작성된 개인 일기, 업무 노트, 학업 성찰 일지 등을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행은 직무 현장에서 축적된 정체성 불일치가 임계점에 도달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동화학습은 자기 자신을 탐구의 대상으로 마주하는 경험을 계기로 조절학습으로 전환되었다. 둘째, 정체성의 충돌은 직업 공간과 학문 공간을 동시에 살아가는 이중 구조 속에서 전개되었고, 학문 공동체와의 상호작용이 연구자 정체성을 내면화하는 기제로 작용하였다. 셋째, 내용·인센티브·상호작용의 세 차원이 통합적으로 작동하면서 전환학습이 이루어졌으며, 과거의 직업적 경험은 존재론적 전환을 실현하는 고유한 학습 자원으로 재구성되었다. 이와 같은 자전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성인학습자의 정체성 이행과 실존적 성찰의 가치가 평생교육 현장 및 후속 연구 속에서 더욱 다양하게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Abstract
This study explores the ontological transformation of an adult learner who transitioned from a secretary to an educational researcher. Using autobiographical narrative inquiry and Illeris's learning model as an analytical framework, data, including personal diaries, work notes, and academic reflection journals produced between 2016 and 2025, were analyzed. The findings are as follows. First, the transition began when workplace identity incongruence peaked, leading to a shift from assimilative to accommodative learning through self-inquiry. Second, identity conflicts unfolded within the dual structure of corporate and academic spaces, while interactions within the academic community facilitated the internalization of a researcher identity. Third, transformative learning occurred through the integration of content, incentive, and interaction dimensions, reconstructing past occupational experience as a unique learning resource. These autobiographical findings highlight the value of identity transition and existential reflection among adult learners and their potential to enrich lifelong education practice and future research.
Keywords:
adult learners, ontological transformation, autobiographical narrative inquiry, Illeris’s learning theory, lifelong learning키워드:
성인학습자, 존재론적 전환,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 Illeris 학습 이론, 평생학습Ⅰ. 서론
나는 20년 가까이 외국계 기업의 비서로 근무하였다. 대만, 영국, 미국에 본사를 둔 기업을 거치며 경영진을 지원하는 일에 점점 능숙해졌고, 그 능숙함은 오랫동안 나 자신을 설명하는 가장 익숙한 언어였다. 그러나 하루의 대부분을 타인의 일정과 요구에 맞추어 살아가던 어느 순간, 정작 내 삶의 방향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능한 비서라는 정체성은 견고했지만, 그 견고함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오래도록 유예되어 있었다.
이 물음은 30대 후반 무렵부터 일기의 문장들 속에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나를 대학원의 코칭 전공으로, 다시 교육학 박사과정으로 이끌었다. 비서에서 연구자로 이행하는 동안 나는 매 순간 이전의 나와 결별해야 하는지, 혹은 그 시간을 다르게 살려낼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본 연구는 이 개인적 물음에 대한 답변이자, 그 이행의 과정을 학문적으로 되짚어 보려는 시도이다. 성인학습자의 존재론적 전환이라는 주제를 이론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에서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생애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자신을 형성하고 재구성하는 존재이다. 성인교육은 이러한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학습을 단순한 지식이나 기술의 소유 영역이 아니라, 학습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구성해 나가는 되어감(becoming)의 과정으로 설명해 왔다(윤여각, 2025). 성인의 학습은 삶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실존적 의미를 획득하며, 기존의 역할과 가치관, 신념 체계가 더 이상 삶을 설명하거나 지탱하지 못하는 전환의 순간에 더욱 심화된다. 특히 익숙한 삶의 방식이 흔들리고 새로운 가능성이 요청되는 시점에서 성인은 자기이해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마주하게 되며, 그 물음은 학습을 단순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확장된다.
UNESCO가 발간한 Faure 보고서(Faure et al., 1972)는 평생교육의 핵심 이념으로 ‘존재하기 위한 학습(learning to be)’을 제시하며, 학습을 인간이 전인적 존재로서 자신을 형성해 가는 과정으로 규정하였다. Delors 보고서(Delors et al., 1996)는 이를 평생교육의 네 가지 기둥 가운데 하나로 재확인하면서, 학습이 개인의 정체성 형성과 존재 방식에 대한 성찰을 지원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Bélanger(2016)는 성인의 학습을 생애 전반(life-long), 삶의 전 영역(life-wide), 그리고 삶의 심층(life-deep)에 걸쳐 이루어지는 총체적 자기 구성의 과정으로 설명하며, 이 논의를 한층 구체화하였다. 세 논의는 성인학습이 단순한 능력 개발이나 사회적 적응을 넘어 존재의 심층적 변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성인학습의 존재론적 차원은 개별 주체의 삶과 존재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구성되는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ransformation)의 맥락에서 정교화된다. Mezirow(1991)는 성인학습을 기존의 의미관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보다 통합적인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설명하였으며, 기존의 해석 틀로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혼란의 딜레마(disorienting dilemma)’를 그 핵심 계기로 제시하였다. Fenwick(2003)은 이 전환을 인지적 변화에 국한하지 않고 삶의 맥락 속에서 정체성과 실천이 새롭게 형성되는 과정으로 확장함으로써, 학습을 개인 내부의 사고 변화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 자체의 변화로 이해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 Jarvis(2006)는 학습을 본질적으로 존재론적 과정이자 실존적 현상으로 규정하며, 학습자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자기이해를 재구성해 간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들 논의를 주도해 온 Mezirow의 전환학습 이론은 인지적 의미관점 재구성을 강조한 나머지, 정서·신체·상상력이 전환 과정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Dirkx, 2006). 특히 Dirkx(2006)는 Mezirow의 이론이 인지적 합리성에 편중되어 전환학습에서 정서와 상상력이 지니는 의미를 소홀히 다루며, 이로 인해 한 개인이 경험하는 내면의 역동성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이 비판은 전환학습을 정서적 에너지와 사회적 상호작용이 결합된 전인적 과정으로 확장하여 이해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최근 성인교육학계에서는 전환학습의 외연을 주체의 실존적 변화를 뜻하는 존재론적 전환으로 확장하려는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Hoggan(2016)은 전환학습의 결과 유형을 체계화하며, 존재론적 변화를 존재 방식 자체가 비가역적으로 전환되는 현상으로 규정하였고, 최근정·한숭희(2024)는 학습을 지식 습득을 넘어 주체의 실존을 변형시키는 생성적 과정으로 개념화하며 존재론적 전환의 쟁점을 논의하였다. 이처럼 최근의 연구 동향은 전환학습을 인지 도식 재편에 국한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한 주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자아 조직 전반의 전면적인 재구성을 수반하는 실존적 현상으로 이해해야 함을 시사한다.
성인학습자의 존재론적 전환과 관련한 국내 연구는 주로 학습 경험을 통한 직업정체성의 형성과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일터 현장에서의 무형식 학습이 전문직 정체성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과 학습민첩성의 매개효과를 검증한 연구(김민규·이찬, 2018), 비교과 프로그램에서의 주도적 경력행동을 통한 대학생의 직업정체성 형성 과정을 분석한 연구(박규미·김정민·홍아정, 2019), 교육기관 유형에 따른 예비 사회복지사의 직업정체성 형성을 비교·분석한 연구(이상주·전병주, 2019), 일터 학습 이론을 기반으로 대학 행정직원의 멘토링 경험과 직업정체성 형성 요인을 규명한 사례연구(오세경·배을규, 2021), 그리고 평생교육사의 무형식 학습 경험을 통해 직업정체성 형성 과정을 탐색한 연구(오세경, 2024) 등이 대표적이다. 해당 연구들은 학습 경험과 직업 수행이 개인의 자기이해를 확장하고 직무적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주요 기제로 작용함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최근에는 직업정체성의 변화를 넘어 학습자의 존재 방식 자체에 주목하는 연구들이 등장하고 있다. 자아개념과 경력 닻을 중심으로 주관적 경력 전환 과정을 탐색한 자문화기술지 연구(양태연·김미화, 2023), 성인학습자의 대학생활 경험을 전인적 성장의 관점에서 분석한 연구(구유정·오석영·박수연, 2021), 자아초월적 학습을 통해 존재론적 전환을 해석한 연구(구자영·이성엽, 2025), 평생교육사의 경력 태도와 일의 의미를 통해 존재 이해의 변화를 탐색한 연구(정희선·이성엽, 2026)는 학습 및 학습자를 존재의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선행 연구들은 한정된 학습 맥락에 국한되어 있거나, 변화의 결과를 단편적인 시점에서 논의하는 데 치우쳐 있다. 이로 인해 개별 주체가 일터와 학습 공간의 충돌 속에서 경험하는 자아 구조의 구체적인 해체 국면은 물론, 이후 실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존재의 재구성 과정을 조명하는 데에는 한계를 지닌다.
본 연구는 Illeris의 통합적 학습 이론을 통해 선행 논의들의 제한점을 보완하는 동시에, 중년 성인학습자의 실존적 변화 과정을 생애 맥락 속에서 조명하고, 그 안에서 발현되는 존재론적 전환을 탐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20년 비서 경력자가 고등교육 체제에 진입하여 겪는 갈등과 변화, 학위 취득 후 연구교수 임용에 이르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이 이행은 사회적으로 경력 전환기 성인이 학습을 통해 실존적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성인학습자의 존재론적 전환을 단선적이고 정적인 결과물로 판정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삶의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실천으로 재정의했다는 점에서 교육적 의의가 있다. 이를 위한 연구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비서에서 연구자로의 이행은 어떠한 계기와 학습 경험을 통해 시작되었는가?
둘째, 연구자로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경험한 정체성의 충돌과 전환은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셋째, 비서에서 연구자로의 이행 과정은 성인학습자의 존재론적 전환과 존재 방식의 재구성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Ⅱ. 이론적 배경
1. 성인학습자의 경력 전환
전통적인 생애 발달 관점에서 경력 전환은 개인이 생애주기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자아개념을 사회적 공간에 구현해 나가는 발달적 과업으로 이해되어 왔다(Super, 1980). 그러나 현대 사회의 경력 전환은 직업 간 이동이나 노동시장 내 재배치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평생학습의 맥락에서 학습은 직무 역량을 개발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재구성하며 의미를 재창조하는 실천적 과정이다(Bélanger, 2016).
경력 전환을 주제로 한 국내 연구들은 주로 역량 개발과 경력 적응이라는 실용적·도구적 차원에 초점을 두는 경향을 보인다. 김정원 외(2023)는 경력단절여성의 사회 재진입을 지원하기 위해 생애단계별 역량의 우선순위를 도출하였고, 이영희·현영섭(2025)은 경력적응모형을 기반으로 적응준비, 자원, 행동 및 결과 간의 구조적 관계를 분석하였다. 이희은·리상섭(2022)은 직업훈련 참여 성인학습자의 구직역량 개발을 위한 교육요구를 탐색하였으며, 황세연·김미경(2025)은 Kano 모델을 활용하여 진로개발역량 향상을 위한 평생학습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정우·김진희·강충서(2024)는 또한 중장년층의 경력전환역량을 진로인식과 직무지식 등 구체적 변인을 중심으로 분석함으로써 실증적 성과 관리에 주목하였다. 이들 연구는 경력 전환의 실천적 지원에 기여하였으나, 전환 과정에서 학습자가 경험하는 내면의 변화에 대한 탐구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고 있다.
비서직 종사자의 경력 전환은 그 직무의 특성상 더욱 복합적인 양상을 드러낸다. 고경력 비서는 조직 내 신뢰와 역할 수행을 통해 강한 직업정체성을 구축하지만, 직무의 구조적 한계와 성장에 대한 고민 속에서 정체성의 흔들림을 경험하기도 한다(강예린·최애경, 2019). 이 긴장과 불일치는 현재의 역할에 대한 재성찰을 촉발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이지은·박윤희(2020)는 비서직 종사자들이 전문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자기개발과 학습을 실천한다고 분석하였으며, 이는 비서직 경력 전환이 단순한 직업적 이동을 넘어 학습을 매개로 한 자기 재구성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경력 전환을 추동하는 내적 동인에 주목한 연구들은 이 과정의 실존적 성격을 분석하였다. 정희선·이성엽(2022)은 생애 사건을 계기로 직업을 전환한 성인학습자들의 경험을 분석하며, 이루지 못한 꿈과 지속된 갈망으로 형성된 변화 욕망이 반성적 성찰과 새로운 학습 참여를 추동하는 핵심 동인으로 작용함을 밝혔다. 특히 연구참여자들은 우연적 사건을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기격려와 인지적 전략을 통해 그것을 학습과 성장의 자원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경험은 단절되거나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로를 설계하는 자원으로 재맥락화된다. 따라서 성인학습자의 경력 전환은 일생에 걸쳐 지속되는 자기 형성의 역동성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2. 존재론적 전환과 전환학습의 개념적 지형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ransformation)과 전환학습(transformative learning)은 성인학습 연구에서 긴밀하게 연계되면서도 개념적으로 구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전환학습은 Mezirow(1991)가 기존의 의미관점에 대한 성찰과 관점 전환을 설명하면서 이론적 체계를 갖추었다. 그러나 Mezirow의 초기 모델은 인지적 합리성에 치우쳤다는 지적을 받아왔으며(Dirkx, 2006), 혼란의 딜레마를 중심으로 한 단선적 설명에 대해 실제 전환은 점진적이고 비선형적인 궤적으로 전개된다는 반론이 제시되었다(Taylor & Cranton, 2012). 이에 따라 최근 연구 지형은 개인 내부의 인지적 수정을 넘어, 관계적·집단적 차원은 물론 신체와 정서, 상상력을 아우르는 전인적 성찰로 그 영역을 확충하고 있다(Taylor & Cranton, 2012).
존재론적 전환은 이러한 전환학습 논의 중에서도 주체의 존재 방식 자체가 변혁되는 가장 심층적인 양상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무엇을 아는가’에 관한 인식론적 차원의 변화나 개별 역량 습득을 넘어,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실존적 차원의 재구성을 가리킨다. 학습자는 일상의 균열 속에서 기존 의미 체계가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하지 못할 때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마주하며 자기이해를 재구성해 간다(Jarvis, 2006).
종합하면, 성인학습의 존재론적 전환은 학습자의 자기이해와 주체성이 재구성됨으로써 자신 및 세계와 관계 맺는 실천 방식 자체가 전면적으로 재편되는 심층적·실존적 과정이다. 따라서 성인학습자의 존재론적 전환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정적인 결과나 인지적 변화만을 측정하는 한계를 넘어, 정서적 역동과 사회적 상호작용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자아 전반의 재구성을 이끌어내는 전인적 관점의 분석 틀이 요청된다.
3. 연구의 분석 틀: Illeris 통합적 학습 이론
앞서 검토한 선행 이론들은 전환학습의 인지적·사회적·다차원적 측면을 규명하는 데 공헌하였으나, 한 주체가 겪는 치열한 내적 갈등과 저항, 그리고 일상적 삶의 공간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시행착오의 역동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를 지닌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Illeris(2014)는 학습을 인지(내용), 정서(인센티브), 사회적 환경(상호작용)이 결합된 전인적 자아 구조의 재구조화 과정으로 재해석하였다.
Illeris(2003, 2018)는 학습을 유전적·생물학적 성숙에 따른 변화를 제외하고, 학습자의 영속적인 능력 변화를 수반하는 포괄적 과정으로 정의하며, 모든 학습이 두 가지 본질적 과정의 통합을 통해 실현된다고 설명하였다. 하나는 학습자와 사회문화적·물리적 환경 간의 외적 상호작용 과정이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자극을 이전의 학습 결과와 연결하여 심리적으로 습득하고 정교화하는 내적 과정이다(Illeris, 2003, 2018). Illeris의 통합적 학습 이론은 선행 연구에서 성인 직업정체성 전환 분석에 유효성이 검증된 바 있으며(오세경, 2024; 오세경·배을규, 2021), 인지적·정서적·사회적 차원을 통합하여 사회 맥락과 개인의 경험이 상호작용하는 학습 과정을 포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분석 틀로 적합하다.
Illeris의 학습 이론은 내용(content), 인센티브(incentive), 상호작용(interaction)이라는 세 차원이 상호 긴밀하게 연결된 통합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Illeris, 2003, 2007). 각 차원은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이라는 단일한 과정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이 결합의 방식과 깊이에 따라 학습의 질과 성격이 달라진다.
첫째, 내용 차원은 ‘무엇이 학습되는가’에 관한 것으로, 학습의 실질적 산물에 해당한다. 이 차원은 지식과 기술의 습득에 국한되지 않으며, 의견, 통찰, 의미, 태도, 가치, 행동 방식 등 학습자의 내면적 구조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를 포함한다(Illeris, 2003, 2007). 내용 차원을 통해 학습자는 삶의 다양한 도전에 대처할 수 있는 기능성(functionality)과 전문성을 점진적으로 구축해 나가며, 이는 단순한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학습자가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틀 자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용 차원의 학습 결과는 인지적 구조의 재편을 수반하며, 이것이 곧 학습자의 정체성 변화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둘째, 인센티브 차원은 ‘왜 학습하는가’의 문제로서, 학습이 발생하고 지속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신적 에너지의 공급과 조절에 관한 것이다. 이 차원에는 느낌, 감정, 동기, 의지 등 학습자의 내적 동력이 포함되며, 학습자가 심리적 균형을 유지하고 학습 과정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근본적인 토대로 기능한다(Illeris, 2003, 2007). 특히 주목할 점은 Illeris가 인지적 내용과 정서적 에너지를 분리된 층위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습자가 습득하는 인지적 지식은 그 학습이 이루어지는 순간의 정서적 에너지의 성격과 강도에 의해 깊이 매개된다. 따라서 인센티브 차원은 학습의 출발점이자 지속과 심화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라 할 수 있다.
셋째, 상호작용 차원은 ‘어떻게 학습이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축으로, 학습자와 사회문화적·물리적 환경 사이에서 발생하는 외적 과정에 해당한다. 지각, 경험, 모방, 참여, 사회적 소통과 협력 등의 다양한 방식을 통해 학습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 속으로 통합되며 사회성을 발달시킨다(Illeris, 2003, 2007). 그러나 상호작용 차원이 실질적인 학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앞서 논의한 내용 차원과 인센티브 차원의 내적 작동이 선행되어야 한다. 외부 환경과의 접촉이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더라도, 그것이 학습자 내부에서 의미 있는 변화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인지적 재구성과 정서적 에너지의 개입이 필수적이다.
Illeris의 이론은 학습을 인지적 변화에 국한하지 않고, 정서적 에너지의 동원과 사회적 상호작용이 결합된 전인적 과정으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학습자는 무엇을 아는가의 문제뿐 아니라 어떤 정서적 상태에서 그것을 경험하는가, 그리고 어떤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구성하는가를 통해 비로소 심층적 변화에 이른다.
특히 Illeris(2003, 2018)는 내적 습득 과정에서 새로운 자극이 기존의 인지 도식과 결합하는 방식과 복잡성에 따라 학습을 누적학습(cumulative learning), 동화학습(assimilative learning), 조절학습(accommodative learning), 전환학습(transformative learning)의 네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누적학습은 기존 도식과 연결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저장되는 단편적 학습이며, 동화학습은 새로운 요소가 기존 인지 도식에 점진적으로 통합되는 일상적 지식 습득에 해당한다(Illeris, 2003, 2007). 조절학습은 새로운 자극이 기존 도식과 충돌할 때 도식 자체를 부분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인지적·정서적 저항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유형과 질적으로 구별된다(Illeris, 2003, 2007). 전환학습은 이 위계의 정점에 위치하는 것으로, 자아 조직 전반에 걸친 근본적 재구성을 수반한다. lleris(2003, 2007)는 이를 ‘인격의 변화(personality changes)’ 혹은 ‘인격 발달(personality development)’로 규정하며, 전환학습 단계에서 학습자는 존재론적 수준의 심층적 변화를 경험한다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가 Illeris 통합적 학습 이론을 분석 틀로 채택한 이유는 비서에서 연구자로의 이행이 지식이나 기술의 습득에 의한 직업의 변화가 아니라 자아 전반의 근본적 재구성을 수반하는 전환학습이며, 그 과정에서 작동하는 정서적 동인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분석하기 위함이다.
Ⅲ. 연구방법
1.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
내러티브 탐구는 인간이 삶을 이야기로 구성하며, 그 과정에서 경험의 의미를 드러내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질적 연구 방법론이다(Connelly & Clandinin, 1990). 이는 개별 인간의 고유한 경험과 맥락을 중시하며, 단순한 분석 기법을 넘어 인간과 경험을 이해하는 인식론적 관점을 반영한다(홍영숙, 2015).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autobiographical narrative inquiry)는 연구자 개인의 고유한 경험을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아, 그 경험이 어떠한 사회적·문화적·제도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해 왔는지를 지속적으로 성찰하는 역동적 과정이다(홍영숙, 2020; Saleh, Menon, & Clandinin, 2014). 이 접근에서 연구자는 과거의 사건을 선형적으로 기록하는 관찰자에 머물지 않고, 이야기를 다시 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현재의 삶과 학습을 새롭게 의미화하는 주체가 된다(Clandinin, 2006). 연구자는 시간성(temporality), 사회성(sociality), 장소(place)라는 3차원 내러티브 탐구 공간을 넘나들며 자신의 경험을 다각도로 해석하고, 그 이야기들이 정체성과 어떻게 맞닿고 충돌하는지를 포착한다(홍영숙, 2015; Clandinin, 2006). 이러한 구조는 삶의 표면 아래에 놓인 다층적 서사를 재발견하고, 정체성 재구성 과정을 통시적으로 추적하는 데 유용하다(Saleh, Menon, & Clandinin, 2014).
본 연구가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를 방법론으로 채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연구의 관심은 비서에서 연구자로의 경력 이동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나타난 존재 방식의 변화와 정체성 재구성에 있다. 존재론적 전환은 단순한 사건의 나열로 설명되기 어렵고, 개인이 경험한 갈등과 성찰, 의미 형성의 과정을 이야기의 형식으로 탐구할 때 비로소 온전히 드러난다(홍영숙, 2015; Clandinin, 2006). 둘째, 탐구의 대상이 연구자 자신의 경험인 만큼 외부 관찰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내면적 경험과 해석이 포함되어 있다.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는 이를 내부자의 시각에서 성찰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의미를 탐색하는 데 적합하다(홍영숙, 2020; Saleh, Menon, & Clandinin, 2014). 셋째, 성인학습자의 존재론적 전환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진적이고 비선형적으로 형성되며(구자영·이성엽, 2025), 개별 경험은 독립된 사건들의 집합이 아니라 상호 연결된 이야기로 이해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선명해진다. 따라서 본 연구는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를 통해 연구자의 체화된 삶의 경험을 통합적으로 성찰하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존재론적 전환의 교육적 의미를 도출하고자 한다.
2. 연구참여자
본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의 연구참여자는 연구자 본인이다.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에서 연구자는 자신의 삶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동시에 그 삶을 해석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연구자의 생애 경로와 학문적 배경을 명확히 기술하는 것은 연구의 출발점인 경험이 어떠한 맥락 속에 위치하는지를 드러내는 과정이며, 연구의 투명성과 타당성을 확보하는 데 기초가 된다(Saleh, Menon, & Clandinin, 2014).
연구자는 대학에서 영어영문학과 경영학을 전공한 후, 2004년부터 약 20년간 외국계 기업에서 비서 직무를 수행하였다. 대만, 영국, 미국에 본사를 둔 기업에서 근무하며 경영진 지원, 조직 운영, 국제적 업무 환경에 대한 실무 경험을 축적하였고, 다양한 국적의 동료들과 협업하며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역량을 개발해 나갔다. 이 시기 연구자에게 직업은 유능함을 증명하는 장이었으며, 조직 안에서 안정적인 경력을 쌓아가는 것이 삶의 주된 방향이었다.
그러나 3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연구자는 직업적 안정과는 별개로 삶의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하였다. 결혼과 출산을 경험하며 다양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가운데, ‘지금의 모습이 진정으로 지향하는 삶의 방향과 일치하는가’라는 질문이 반복되었다. 이 물음은 직업적 불만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탐색의 시작이었다.
연구자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던 중 코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2020년 A대학교 경영대학원 코칭 전공 석사과정에 진학하였다. 약 20년 만에 학습자로 대학에 복귀한 경험은 직장인으로서 살아온 삶과는 다른 층위의 배움을 마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석사과정에서 연구자는 코칭이 실천적 방법론이라면 그 근본은 인간의 변화와 성장을 탐구하는 교육학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계기로 2022년 석사 졸업 직후 A대학교 일반대학원 교육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하였다. 이후 독서, 세미나, 연구, 논문 작성 등 학문적 훈련에 몰입하면서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점진적으로 형성해 나갔다.
연구자는 2025년 8월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비서로서의 경력을 마무리하고, 현재는 대학에서 학생들의 학습과 진로 탐색을 지원하는 교육 및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본 연구는 연구자의 생애 경로를 단순한 전직의 서사로 환원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연구자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고 재구성되었는지를 내러티브 탐구 방법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3. 자료 수집 및 분석
내러티브 탐구에서 자료는 연구자의 삶을 구성하는 경험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재구성하는 현장 텍스트(field texts)로 이해된다(Clandinin, 2006). 본 연구의 자료는 연구자가 비서로서의 직업적 정체성을 확립한 이후 삶의 방향에 대한 성찰이 본격화된 2016년부터 박사학위를 취득한 2025년에 이르는 약 10년에 걸쳐 작성된 다양한 문서로 구성되며, 자료의 성격에 따라 개인적 기록, 업무 기록, 학업 성찰 기록, 상호작용 자료, 기타 자료로 구분할 수 있다.
연구자는 지난 2025년 12월부터 본 연구의 문제의식을 구체화하고 자료 구상을 시작하였다. 이후 2025년 12월부터 2026년 3월 중순까지 4달에 걸쳐, 지난 10년간 축적된 생애사적 기록물들을 선별하고 정제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정비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분석 대상이 된 자료의 유형별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적 기록은 2016년부터 2025년까지 지속적으로 작성해 온 개인 일기가 포함된다. 이 자료는 일상적 감정, 실존적 갈등, 육아와 학업 병행의 소회 등 연구자의 내면을 이해하는 1차적 기록으로, 이행 과정 전반에 걸친 내면의 흐름을 탐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둘째, 업무 기록은 2016년부터 2023년까지 직장 생활 중 작성한 업무 일지가 포함된다. 이 자료는 연구자가 비서로서 수행한 직무의 내용과 변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연구자가 직업적 역할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행해 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맥락적 근거로 기능한다. 셋째, 학업 성찰 기록은 2020년 3월 석사과정 입학 시점부터 2022년 3월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2024년 8월 박사과정을 수료하기까지의 전 기간에 걸쳐 작성한 학업 성찰 일지가 포함된다. 이 자료는 연구자가 학문 공동체 안에서 사고방식과 언어를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 즉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넷째, 상호작용 자료로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지도교수의 수업 과제 피드백 및 학문 공동체 구성원들과 교환한 메일이 포함된다. 이 자료는 연구자의 전환이 고립된 개인의 내적 변화만이 아니라, 특정한 관계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기능한다. 다섯째, 기타 자료로는 공저 참여 저서와 공백 시기의 회고적 글쓰기가 포함된다. 공저 저서는 연구자가 학문적 실천의 주체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회고적 글쓰기는 자료 공백 시기의 경험을 현재의 시각에서 재서술한 것으로 내러티브의 연속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홍영숙, 2020; Clandinin, 2006). 최종적으로 분석의 대상이 된 연구 자료의 유형은 <표 1>과 같다.
수집된 자료는 내러티브 탐구 방법론이 제시하는 핵심 원리, 즉 현장 텍스트(field texts)에서 연구 텍스트(research texts)로의 전환 과정을 따라 분석하였다(홍영숙, 2020; Clandinin, 2006). Clandinin(2006)은 내러티브 탐구를 단선적 절차가 아니라 시간성(temporality), 사회성(sociality), 장소(place)라는 세 가지 차원이 교차하는 3차원적 탐구 공간 속에서 경험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재구성해 가는 과정으로 규정하며, 살기(living)-말하기(telling)-다시 말하기(retelling)-다시 살기(reliving)의 순환적 과정을 분석의 기본 절차로 제시한다. 본 연구는 이 원리를 분석의 방법론적 틀로 삼되, Illeris(2007, 2018)의 통합적 학습 이론을 이론적 해석 준거로 병행 적용하였다. 즉 내러티브 탐구의 3차원 공간이 경험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방법론적 원리를 제공한다면, Illeris의 이론은 그 경험이 학습의 어떤 차원과 유형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에 대한 분석을 제공한다.
구체적인 분석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연구 주제와 관련된 시기와 경험의 핵심을 간략히 기록하며 탐구하려는 이야기의 윤곽을 구체화하였다. 이는 연구자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서 살아내는 과정, 즉 탐구의 출발점에 해당한다(홍영숙, 2020). 두 번째 단계에서는 개인 일기, 업무 노트, 수업 성찰 일지, 지도교수 피드백, 이메일 등의 자료를 현장 텍스트로서 연구 주제와의 관련성을 기준으로 검토하고 정리하였다. 문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일부 시기에 대해서는 회고적 글쓰기를 통해 현장 텍스트의 공백을 보완하였다. 이는 경험을 언어로 이야기하는 단계에 해당한다(홍영숙, 2020). 세 번째 단계에서는 수집된 현장 텍스트를 Illeris의 학습 이론을 해석 준거로 삼아 반복적으로 읽으며 의미 있는 경험 단위를 발견하고 중간 연구 텍스트를 구성하였다. 시간성의 차원에서는 각 경험이 이전 학습과 이후 변화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추적하며 학습 유형의 전환 양상을 파악하였고, 사회성의 차원에서는 관계적 맥락 속의 상호작용이 학습의 내용 및 인센티브 차원에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분석하였으며, 장소의 차원에서는 회사, 대학원, 도서관 등 공간적 맥락이 정체성 전환의 의미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출된 경험 단위들을 네 단계의 학습 유형에 대응시켜 해석하고 각 국면이 지니는 이야기의 의미를 서사적으로 재구성하였다. 이 과정은 이야기를 다시 말하는 단계에 해당한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분석 결과를 서사적 흐름 속에 재배치하되, 개별 경험이 이론적 담론과 어떻게 공명하는지를 드러낼 수 있도록 자전적 내러티브와 학술적 분석을 결합한 최종 연구 텍스트를 구성하였다. 이 과정은 재구성된 이야기를 다시 살아내는 단계로서, 연구자가 자신의 경험을 새로운 의미로 통합하는 과정이다(구자영·이성엽, 2025; 홍영숙, 2020).
본 연구의 신뢰성과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음의 세 가지 방안을 적용하였다.
첫째, 개인 일기, 업무 노트, 이메일 등 다양한 유형의 자료를 교차 검토하는 삼각 검증을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단일 자료에 의존할 때 발생할 수 있는 해석의 편향을 최소화하고, 경험의 다층적 의미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둘째, 성인교육 및 평생학습 분야에 전문성을 지닌 전문가 2인과의 지속적인 피드백을 통해 분석 결과를 재성찰하고 정교화하였다. 먼저 지도교수에게 분석 과정 전반에 대한 검토를 요청하였고, 이어서 대학 강의와 연구 활동을 병행하며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에 전문성을 지닌 교육학 박사에게 동료 검토를 의뢰하였다. 특히 10년 가까이 축적된 연구 자료의 방대함에 비해 현장 텍스트에 대한 구체적 명시가 부족하여 분석의 엄밀성이 저해될 수 있다는 동료 전문가의 지적을 반영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연구자 내부의 시각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해석의 맹점을 외부의 시각으로 점검함으로써 분석의 객관적 타당성을 확보하는 토대가 되었다. 셋째, 연구자는 박사과정 진입 이후 지속해 온 성찰적 글쓰기를 연구 전반에 걸쳐 실천하며, 자신의 경험을 내부자이자 동시에 비판적 관찰자의 시각으로 검토하는 성찰적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였다(홍영숙, 2020).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에서 연구자는 탐구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라는 이중적 위치에 놓이므로, 자신의 서사를 미화하거나 의미를 선택적으로 구성하는 오류에 노출될 위험이 있다(Saleh, Menon, & Clandinin, 2014). 따라서 연구자는 성찰적 글쓰기를 단순한 자료 생성의 수단이 아니라 편향과 주관적 예단을 점검하는 방법론적 장치로 활용함으로써, 자전적 연구에서 요구되는 성찰성을 실천하고 본 연구의 해석적 타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Ⅳ. 연구 결과
1. 다양한 역할 속에서 나를 확신하다
비서라는 직업 세계로의 진입은 주체적 선택의 결과였다. 학창 시절부터 외국어와 리더십에 관심을 가졌던 나는 그 관심을 구체화하고자 영어영문학과 경영학을 전공하였다. 졸업을 앞두고 내가 가진 역량들이 가장 온전히 요구되는 자리는 어디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외국어 능력, 대인 감수성, 경영지원 역량이 동시에 요구되는 외국계 기업의 전문비서는 그 물음에 대한 자연스러운 답이 되었다. 기대와 열망을 품은 채 그 세계로 진입하였다.
You are the best! (2016. 5. R 사장님 이메일 발췌)
비서로서의 삶이 10여 년에 걸쳐 축적되면서, 내 안에는 단순한 기능적 조력자를 넘어선 전문비서라는 견고한 직업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조직의 핵심 의사결정 과정에 밀착하여 그 흐름을 함께 조율한다는 감각은 업무의 고단함을 견디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특히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을 때의 성취감은 직업적 자아를 구성하는 단단한 경험으로 축적되었다.
2016년을 전후하여 나의 직업 세계는 조직 내에서의 확고한 효능감과 존재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IIlleris(2003, 2007)의 학습 이론에 따르면, 성인의 일터 실천은 개인의 내재적 조건과 외재적 환경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며, 이 단계에서 직무 수행은 반복적 업무 절차를 완수하는 자동화된 누적학습의 성격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완전한 수행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직무 경험의 누적은 극대화되었으며, 정교화된 도식 위에서 직업적 자아는 더욱 견고해졌다.
2017년 2월, 반도체 산업 분야의 대규모 국제 전시회인 세미콘 코리아(SEMICON Korea)가 있었다. 본사 고위 임원진의 방한과 주요 글로벌 고객사 VIP들이 참석하는 이 행사는 분 단위의 일정 조율과 즉각적인 상황 대응이 요구되는 행사였다. 참석자들의 동선과 요구사항을 조율하며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이후, 조직 전체가 함께한 자리에서 느낀 안도감과 성취감은 당시 나의 직업적 자아를 뒷받침하는 경험이 되었다. 이 시기 작성한 업무 일지에는 32개의 to-do list가 빠짐없이 완료되어 있었으며, 그 안에는 당시의 직업적 효능감과 자부심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누구든 내 일을 할 수는 있어도
그 일을 나보다 잘할 사람은 이 회사에 없다. (2017. 2. 업무 일지 발췌)
그러나 그 성과의 이면에는 다른 층위의 긴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직장인이자 엄마로서 감당해야 하는 역할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점차 버거워졌으며, 정서적 방어 기제와 함께 누적학습의 포화 상태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점심시간에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을 보는데 칸쿤과 엘스카가 떠올라서 눈물이 날 뻔했다. 내가 유별난 것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부지런히 자란다.
어제 알던 아이와 이별하고 오늘 또 새로운 아이를 만난다.
나는 엄마이기 위해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엄마라서 느낄 수 있는 충만함과 위로는 특별하다.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은 나는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자란다. 나도 성장하고 싶다. (2018. 5. 개인 일기 발췌)
직업적 성취의 견고함 아래에서,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는 삶에 대한 물음과 새로운 성장을 향한 갈망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2. 대학원에서 만난 코칭으로 나를 다시 읽다
변화의 단서는 일상적 경험 속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회사의 대표였던 R 사장님은 은퇴 이후 미국에서의 코칭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며, 나에게 가족·재무·학습과 성장의 세 영역에 걸친 20년 인생 계획을 구상해 볼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일상적인 조언에 가까웠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마음에 남아 내적 성찰을 촉발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Does your schedule reflect your value?
요즘 재미, 인생의 낙은 무엇인가. 칸쿤과 엘스카, 일 외에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일까.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가.
10년 후 나는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싶은가.
Live a life aligned with your values. (2019. 7. 개인 일기 발췌)
첫째 아이와 함께 유치원 등원 길을 걷던 어느 날 아침에 아이가 불쑥 물었다. “엄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나는 웃으며 “너 같은 예쁜 아가의 엄마가 되는 것”이라 말하였고 그 대답은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직 말해지지 않은 무언가가 그 안에 남아 있다는 느낌이 분명히 들었다. 아이의 질문은 소박했으나, 그것이 촉발한 내면의 움직임은 단순하지 않았고 그 물음은 마음에 꽤 오래 남아 있었다. 그 시기에 한 코치가 쓴 칼럼을 우연히 읽었고, 글을 읽으며 마음이 쿵쾅거렸다. R 사장님으로부터 코칭을 처음 접했던 기억, 20년 인생 계획을 구상하며 설레었던 마음이 다시 살아났다.
2014년에 오빠가 공부를 다시 해보라고 했었다. 그때는 힘들어도 일을 하고 싶었는데...
현명하게 말하고 싶다면 현명하게 살아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쓰고 싶은 글을 삶에서 먼저 증명할 것.
날고 싶으면 먼저 둥지를 떠나라. (2019. 10. 개인 일기 발췌)
나는 A대학교 경영대학원에 국제 코칭 과정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바로 대학원 입학 원서를 신청하였다.
2020년 대학원에 입학하여 코칭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20여 년 만에 돌아온 모교에서의 학업은 그 자체로 긍정적인 활력이 되었다. 팬데믹으로 인한 비대면 수업 환경은 일과 학업의 병행을 가능하게 하였고, 오랜 시간 유예되었던 학습에 대한 내적 동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누구든 나를 도울 수는 있지만 내 인생을 책임질 수는 없다.
스스로 당당하기 위한 공부를 할 것.
공부가 불안을 이기는 힘이다. (2020. 6. 개인 일기 발췌)
대학원에서 마주한 코칭이라는 학문 체계는 동화학습(assimilative learning)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나에게는 비서로서 10여 년간 체화해 온 대인 감수성, 소통 역량, 그리고 R 사장님을 통해 경험했던 코칭의 기억이 견고한 도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학원에서 배우는 코칭의 이론과 기법들은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의 학문이 아니라, 내가 이미 삶에서 경험하고 지향해 왔던 가치들을 학술적 언어로 정교하게 확인받고 확장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수업 시간에 다루어지는 경청, 질문, 지지라는 코칭의 핵심 요소들은 내가 비서로서 매일 수행하던 직무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었다.
경청은 상대에 대한 배려이자 성공을 위한 우아한 전략. (2020. 10. 업무 일지 발췌)
이 시기 동화적 학습은 학문 공동체 내에서 실천으로 점차 확장되었다. 국제 코칭 과정을 함께 이수하던 대학원 원우들과 공저로 책을 집필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산을 오르고 있다.
뚜렷한 목적지를 마음에 품고 뚜벅뚜벅, 소중한 한 걸음을 내딛는다.
곁에는 보폭을 맞춰 걷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든든하다.
하지만 산을 오르는 도중에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속도를 내야 하는 순간도, 휴식이 필요한 시간도,
어쩌면 우리의 목적지도 모두 다르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후에 각자가 바라는 거대한 산의 정상에서
지금껏 수고한 서로에게 뜨거운 축하를 건넬 수 있길.
서툴지만 씩씩했던 서로의 첫걸음을 다시 추억하기 바란다. (2021. 2. 개인 일기 발췌)
당시 일기에 담겼던 다짐과 고백은 공동 저서인 ‘어쩌다 코칭’의 에필로그가 되었고, 2021년 11월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3. 학문 공동체 안에서 연구자의 언어를 배우다
코칭 지식을 기존 직무 경험의 틀 안에서 흡수하던 동화학습의 흐름은 석사 3학기에 수강한 NLP(Neuro-Linguistic Programming) 수업을 계기로 질적인 전환을 맞이하였다. 첫 수업에서 Y 교수님은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나는 지금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나는 지금 왜 여기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21. 3. 성찰 일지 발췌)
휴먼 라이브러리(Human Library)로 명명된 이 수업의 질문들 앞에서 나는 성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나 자신을 기능적 주체가 아닌 탐구의 대상으로 마주했다. 동료 학습자들의 삶의 서사를 경청하고 나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은 타자의 경험이 자기이해의 거울로 작동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1인 다역을 하고 계시군요. 그럼에도 공부까지... 응원의 박수 보냅니다. 비서는 10년 이상 하면 CEO 훈련을 모두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모든 경험이 귀한 자원이리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2021. 3. Y 교수님 피드백 발췌)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성찰 일지를 통해 처음으로 나의 삶을 학술적 언어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만년필이 되고 싶은데 17여 년의 직장 생활을 거치며 채워지기보다 쓰이기 바쁜 몽당연필이 된 듯하다는 성찰에 Y 교수님은 “몽당연필이라니, 참 알차네요”라는 피드백을 주셨다. 워킹맘으로서의 늘 바쁘기만 하던 직장 경험이 결핍이 아니라 고유한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었다.
“이 정도면 됐어. 충분해.”라는 말이 긍정의 위로가 아니라,
실은 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두는 벽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부정적 신념, 그리고 그림자는 무엇일까? (2022. 10. 개인 일기 발췌)
석사과정을 마칠 무렵, Y 교수님을 지도교수님으로 모시고 본격적인 학문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확신이 들었다. 코칭의 실천적 관심은 인간의 학습과 성장을 근원적으로 탐구하려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박사과정 면접 자리에서 한 교수님께서 나의 이력을 두고 ‘퍼즐이 맞지 않는다’라고 지적하셨다. 영어영문학과 경영학을 복수전공한 학사, 경영학 석사, 그리고 교육학 박사과정으로의 진입은 선형적 학문 경로와는 거리가 있었다.
다이아몬드를 캐려고 산을 오르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다.
그곳에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다.
가는 길에 바람을 쐬고 꽃이나 보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길이 쉽지 않으면 더욱 좋겠다.
“힘들었지. 그런데 진짜 열심히 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나도 하나 정도는 남기고 싶으니까.
누구의 인정도 필요하지 않은 나만의 작은 성취는 온전하다.
나는 그러한 것을 갖고 싶다.
내가 나의 퍼즐을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다. (2021. 12. 개인 일기 발췌)
박사과정으로의 진학은 학습 공간의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낮에는 회사의 비서로, 저녁과 주말에는 교육학 박사과정생으로, 그리고 언제나 두 아이의 엄마로 존재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나의 정체성은 서로 다른 언어와 가치 체계 위에 있었으며, 그 간극은 일상의 매 순간 감지되었다. Clandinin(2006)이 제시한 내러티브 탐구의 장소(place) 차원에서 볼 때, 박사과정의 강의실은 기존의 직업적 자아가 가장 강하게 도전받는 장소였다.
매주 쏟아지는 원서 강독과 세미나 발표, 논문 작성의 요구는 비서로서 축적한 역량이나 코칭 과정에서 형성한 자신감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능력을 요구하였다. 익숙한 인식의 틀이 반복적으로 도전받는 그 과정은 조절학습(accommodative learning)의 국면이었다. 조절학습은 새로운 내용을 기존 도식에 통합하는 동화학습과 달리, 기존 인지 도식 자체의 부분적 해체와 내부 구조의 변형을 수반한다(Illeris, 2003, 2007). 매주 제출하는 성찰 일지와 지도교수님의 피드백, 동료 원우들과의 상호작용은 그 변형을 추동하는 구체적인 계기들이었다.
이 수업 하나 들으려고 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라고 해도 아깝지 않다. (2022. 3. 개인 일기 발췌)
이 시기의 학습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재구성을 촉진하였다. 비서로서의 경험과 워킹맘으로서의 일상은 결핍이 아닌 연구의 자원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으며, 나는 그 안에서 연구자 정체성의 내적 기반을 서서히 형성해 나갔다.
4. 상호작용을 통해 연구자 자아를 키워가다
박사과정이 본격화되면서 갈등은 추상적 긴장이 아닌 일상의 구체적 장면으로 나타났다. 석사과정의 학업은 조직 내에서 용인되는 범위 안에 있었다. 그러나 박사과정 진학은 조직이 기대하는 비서로서의 역할 전념과 명시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할 거면 고등학생 때 하지 그랬어요.”
L 상무님은 농담으로 하신 말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킨 기분이라 이렇게 곱씹어지는지는 걸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리 가면 된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존재로 살고 싶다. (2023. 5. 개인 일기 발췌)
타인의 말이 마음에 오래 남은 것은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던 물음과 닮아있기 때문이었다.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라 스스로 말하면서도, 자식 또래의 학생들 틈에 섞여 퇴근 후 학교 도서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때면 나도 모르게 쑥스러워지곤 했다. 회사 사무실과 학교 도서관은 물리적으로 다른 공간일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자아상과 가치 체계가 작동하는 상징적 장소였다. 전자는 역할과 기능으로 정의되는 정체성을 요구하였고, 후자는 그 역할 이전의 자기 자신을 탐구하도록 질문하였다.
Illeris(2007, 2018)는 정체성 학습이 학습 내용과 동기, 감정과 같은 인센티브(incentive) 차원이 서로 갈등하고 협상하는 내적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며, 기존 도식이 감당할 수 없는 갈등을 해소하고 학습 체제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조절학습이 심화된다고 설명한다. 두 공간 사이의 긴장은 주체성을 위축시키는 소모적인 갈등이 아니라, 기존 비서의 한계를 직면하고 새로운 정체성 재편을 추동하는 강력한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충돌이 깊어질수록 학습은 삶의 중심으로 이동하였다. 박사과정 5학기 동안 단 한 차례의 지각이나 결석도 없었던 것은 학업을 최우선으로 두겠다는 선택의 실천이었다. 교육학적 기초 없이 교육학 석사 배경을 가진 동기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은 지적 도전이었고, 그 격차를 인식할수록 학업에 대한 몰입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정체성의 탐색은 구체적인 실천의 장을 만나며 확장되었다. 박사과정 수료를 한 학기 앞둔 시점, B대학교의 튜터로서 280여 명의 성인학습자를 지원하는 기회를 맞이하였다. 다양한 연령대와 각기 다른 생애 맥락을 지닌 학습자들이 저마다의 치열한 삶의 조건 속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모습은 지나온 나의 학습 경험과 깊이 공명하였다. 이들의 학습 여정을 조력하고 성장을 연구하는 일이야말로 내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실천이자 연구 분야임을 점차 확신하게 되었다.
2024. 5. 교수님 이메일
“좋은 딸, 좋은 며느리, 좋은 아내, 좋은 엄마로서도 충분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하기엔 너무 아까운 재능이고 너무 짧은 인생이에요.
그대의 모든 가능성을 다 느껴보는 지구별 소풍 되시길.”
힘들다고 느껴질 때마다 꺼내봐야지. 감사합니다! (2024. 5. 개인 일기 발췌)
지도교수님의 이메일과 B대학교 학습자들과의 만남은 단순한 정서적 지지를 넘어, 연구자 정체성이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강화되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장으로 기능하였다. Illeris(2007)는 학습의 사회적 차원에서 의미 있는 타자와의 관계적 상호작용이 기존 인식 틀의 점검과 재구성을 촉진하는 핵심 조건임을 강조한 바 있다. 지도교수님과의 소통 과정은 기존의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하는 인지적 계기로 작용하였으며, 학습자들과의 만남은 실제 교육 맥락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인식하게 하였다. 이 과정은 외부의 인정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차원을 넘어, 상호작용 속에서 연구자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재해석하는 능동적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5. 온전한 연구자로 살아가다
2024년 3월에 감행한 육아휴직 신청은 실존적 동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워킹맘으로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과정에서 아이들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누적되어 있었고, 그 시간을 회복하고자 하는 바람이 결정의 큰 축을 이루었다. 동시에 20여 년간 유지해 온 직업적 정체성과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연구자 정체성 사이의 긴장은 더 이상 유예될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이 순간의 멈춤은 회피가 아니라 내면의 갈등을 직면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나비를 잡으러 쫓지 않는다. 대신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면 나비들이 올 것을 알기에.
미래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지금 하루하루 매 순간 정성을 다하자.
얼굴은 푸석해도 하루는 빛나리. 도서관 3층 28번 자리에서. (2024. 6. 개인 일기 발췌)
휴직 이후의 삶은 아이들과의 일상을 촘촘히 채워가는 정서적 회복인 동시에 매일 일정한 시간에 학교 도서관을 찾아 논문 작업을 지속하는 연구자로서의 출근이기도 했다. 이 몰입의 시간 속에서 논문 작업이 언제나 일정하게 진척된 것은 아니었으나, 온전한 내어줌 속에서 두 과업에 집중할 수 있다는 조건 자체가 지속의 강력한 동인이었다. 낮 시간의 치열한 학문적 탐색과 저녁 시간 아이들의 눈을 맞추는 평화로운 일상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도리어 깊은 성찰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아이들의 성장을 곁에서 지키며 비로소 내가 삶에서 정말로 가치를 두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싶은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의 고유한 색깔이 존중받고 서로 따뜻하게 연대하는 세상을 희망한다.
날카로운 경쟁의 언어 대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학문을 대하고 함께 성장해 나가는,
그러한 배움이 실천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
내가 존재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2024. 9. 개인 일기 발췌)
쉼과 비움의 시간은 단순히 박사학위 논문 완성을 넘어, 삶의 가치를 중심에 둔 연구자로서의 존재 방식을 확립하는 사유의 시간이 되었다. 외적인 분주함을 비워내니 명상과 수영을 통해 내면의 감각과 직관을 깨우는 일에도 몰입할 수 있었다.
2025년 초, 회사로부터 복직을 확인하는 연락을 받았다. 복직 후 일정 기간 근무하여 잔여 휴직급여를 수령한 뒤 이직을 도모하는 것이 외적 조건만을 고려할 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쉼과 비움의 시간 동안 정련해 온 내면의 직관은 이미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회사에 교육학 박사인 비서가 필요할까?
교육학 박사인 나는 반도체 회사에서 익숙한 일을 다시 하고 싶은가?
삶의 모든 측면을 탐험하며 온전하게 살아가자. (2025. 2. 개인 일기 발췌)
노련한 비서라는 익숙한 옷은 나에게 더 이상 확신을 주지 못했다. 내가 가진 교육학적 전문성과 비서라는 역할 사이의 괴리를 직면했을 때, 안주하기보다 나다운 삶의 영토를 개척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층 뚜렷해졌다. 경제적 이해나 주변의 보편적인 기준을 내려놓고, 배움의 실천가이자 온전한 연구자로서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사직을 선택하였다. 이는 오랜 직업정체성과의 작별이자, 내가 바라는 연대와 사랑의 학문을 세상에 실천해 나가겠다는 연구자로서의 주체적인 첫걸음이었다.
Illeris(2003)의 통합적 학습 이론에 비추어 보면, 이 시기의 갈등은 내용, 인센티브, 상호작용의 세 차원이 동시에 작동한 학습의 계기였다. 비서로서의 직업정체성과 교육학 박사로서의 연구자 정체성이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통합될 수 없다는 인식은 내용(content) 차원의 인지적 갈등을 형성하였고, 안주 대신 나다운 삶의 영토를 개척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는 인센티브(incentive) 차원에서 강력한 학습 추동력으로 기능하였다. 동시에 복직이라는 환경적 압력은 기존의 자아 구조를 유지하거나 전면적으로 재편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상호작용(interaction) 차원의 긴장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Illeris가 말하는 전환학습(transformative learning), 즉 자아 정체성 전반의 재구성을 수반하는 학습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삶은 언제나 나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한 시점에 정확히 준다.
현재 내가 가진 것의 깊이와 찬란함을 온전히 캐낼 것이다. (2025. 9. 개인 일기 발췌)
연구자는 2025년 8월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S대학교 연구원으로 근무한 후 2026년 모교인 A대학교 연구교수로 임용되었다. 비서로 첫 출근하던 나와 현재의 나는 표면상 다른 자리에 서 있으나, 그 관계는 단절이 아니라 심화라 할 수 있다. 조직의 비전을 전달하고 부서 간 협업을 이끌었던 비서로서의 실천적 경험은 학습자의 성장을 지원하고 학문 공동체를 촉진하는 현재 연구자 및 교수자로서의 역할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1년 전쯤부터 오늘 만날 아이들을 위해 기도를 해왔다.
그들이 평온한 하루를 잘 보내고 언젠가 나와 반갑게 만나기를.
오늘 그 아이들, 36명의 학생들을 만났다.
반갑다. 한 학기 동안 잘 해보자. (2026. 3. 개인 일기 발췌)
성찰하며 기록했던 지날 날의 다짐은 이제 대학이라는 구체적인 환경 속에서 실천적 지식으로 생성되고 있다. 나의 이행은 한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매일의 배움과 나눔 속에서 연구자로서의 존재 방식을 구성해 가는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6. 비서에서 연구자로의 존재론적 전환의 의미
본 연구자의 자전적 내러티브는 직무와 소속 기관이 바뀌는 외형적 전직의 차원을 넘어, 자아를 규정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내적 틀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존재론적 전환의 과정을 보여준다. Illeris(2003, 2014)의 통합적 학습 이론에 따르면, 심층적 전환학습은 내용(content), 인센티브(incentive), 상호작용(interaction)의 세 차원이 하나의 학습 과정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동시에 작동할 때, 비로소 학습자의 정체성과 존재 방식의 변화로 완성된다. 본 연구자에게 일어난 비서에서 연구자로의 이행을 이 세 차원을 중심으로 구체화하면 다음과 같다.
내용(content) 차원에서 존재 방식의 재구성은 기능적 조력자로서의 도구적 자아에서 실존적 탐구자로서의 존재론적 자아로 지평이 확장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학습 초기 본 연구자가 접한 학습 내용은 직무 효능감을 높이거나 코칭 기법과 지식을 습득하는 도구적·기능적 영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교육학적 학문 세계로의 탐색이 깊어지면서, 학습의 실질적 산물은 이론적 정보의 축적을 넘어 나 자신과 삶의 의미, 타자와의 관계를 탐구하는 실존적 사유로 확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식 습득은 단순한 정보 수용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인지 도식 자체를 해체하고 재편하는 작업을 수반하였다. 타인의 필요를 조율하고 조직의 목표를 완수하던 기능적 조력자의 존재 방식은 삶을 학문의 언어로 이해하고 성인학습자의 성장을 조력하는 연구자의 존재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 내용 차원의 전환에서 특히 주목할 지점은 과거 20여 년에 걸친 비서 경험의 재의미화이다. 전환학습을 통해 비서로서의 경력은 단절된 한계가 아니라, 현장의 맥락을 기민하게 포착하고 학습자와 깊이 소통하며, 학문 공동체 내에서 성장을 촉진하는 고유하고 강력한 학습 자원으로 재구성되었다.
인센티브(incentive) 차원에서 정서적 갈등과 소외감, 성장 열망은 기존의 존재 방식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전환을 추동하는 결정적 내적 동력으로 작동하였다. 직무 현장에서 장기간 축적된 정체성의 불일치와 실존적 소외감, 그리고 직장과 대학원이라는 상충되는 두 공간 사이에서 발생한 심리적 긴장은 일상의 안정을 흔드는 정서적 균열을 형성하였다. Illeris(2003, 2007)가 강조하듯 인지적 내용과 정서적 에너지는 분리될 수 없으며, 감정과 동기는 학습의 방향과 깊이를 결정하는 핵심 축이다.
본 연구자에게 발생한 정서적 불안과 충돌은 학습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기보다, 기존 존재 방식이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신호이자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하도록 이끄는 내적 나침반으로 기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터에서의 소외감과 학문 공간에서 느낀 정서적 충만함 사이의 대비는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기회가 되었다. 연구자는 정서적 역동을 통해 타인의 인정이나 외적 평판보다 나다운 삶의 존재 방식을 실현하려는 내재적 동기를 확인하였고, 이는 익숙한 비서직을 내려놓고 주체적인 연구자의 길을 선택하는 결단의 근간이 되었다.
상호작용(interaction) 차원에서 존재 방식의 재구성은 개인 내부의 고립된 성찰에 그치지 않고, 의미 있는 타자 및 학문 공동체와의 지속적인 관계적 실천을 통해 비로소 사회적으로 완성되었다. 상호작용은 개인 내면의 변화를 사회적 맥락 속에서 검증하고 공고히 하는 정체성 형성의 핵심 장이었다. 지도교수와의 성찰적 대화, 과제 및 성찰 일지에 대한 피드백, 이메일을 통한 정서적 지지는 기존의 인식 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객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B대학교 튜터로서 경험한 성인학습자들과의 만남은 지나온 학습 서사를 타자의 삶과 연결하고, 성인학습자의 성장을 조력하는 연구자로서의 존재 방식을 실제 현장에서 확인하고 내면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타자와의 소통과 학문적 나눔 속에서 연구자의 언어를 체화하고 실천함으로써, 관념적 수준에 머물 수 있었던 존재 방식의 변화는 학문 공동체 안에서 연대하고 실천하는 연구자의 삶으로 구체화되었다. 연구자인 ‘나’의 여정을 Illeris의 학습 유형 및 세 차원에 따라 정리한 표는 다음과 같다.
현장 텍스트를 Illeris(2003, 2007)의 학습 이론을 준거로 분석함에 있어, 연구자는 각 학습 유형을 식별하고 그 구분을 객관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기준을 설정하였다. 첫째, 누적학습은 기존 인지 도식과 연결되지 않은 단편적 정보의 수용 과정으로 보고, 감정적 동요 없이 기술된 업무 수행 기록을 주요 준거로 삼았다. 둘째, 동화학습은 새로운 자극이 기존 인지 도식에 자연스럽게 통합되는 과정으로, 이미 체화된 경험을 학술적 언어로 확인하는 성찰 기록이나 직무 경험과 코칭 개념 간의 유기적 서술을 통해 포착하였다. 셋째, 조절학습은 기존 도식의 부분적 해체와 재구성을 수반하며 정서적 저항이 동반되는 학습이다. 이는 불안, 혼란, 자괴감 등이 명시된 일기 기록과 익숙한 방식이 도전받는 상황에 대한 성찰적 반응을 식별 기준으로 삼았다. 넷째, 전환학습은 자아 정체성 전반의 근본적 재구성을 의미하며, 이전 자아의 재의미화, 삶의 지향점에 대한 재설정이 기록된 일기 및 사직과 같은 결단의 실행을 핵심 근거로 삼았다.
Illeris(2014, 2018)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세 차원의 통합적 작동을 통해 정체성과 존재 방식의 전환학습을 경험한 주체는 이전의 자아 상태나 삶의 방식으로 회귀할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를 경험한다. 본 연구에서 나타난 비서에서 연구자로의 이행은 단순한 업무 내용이나 소속의 변경을 넘어, 과거의 생애 경험 전체를 새로운 존재의 관점에서 재맥락화하고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존재 방식 자체를 재구성한 존재론적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 방식의 재구성은 연구자 개인의 성취에 머물지 않는다. 경력 전환과 정체성 갈등을 겪는 성인학습자들에게 삶의 불일치와 내적 균열을 성장의 자원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교육적 함의를 지닌다. 나아가 본 연구의 결과는 전환학습이 구체적인 생애 서사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를 통해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의가 있다.
Ⅴ. 결론 및 논의
본 연구는 20여 년간 기업의 비서로 종사해 온 성인학습자가 학문적 세계로 진입하여 교육학 연구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존재론적 전환의 양상과 교육적 의미를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 방법으로 조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2016년부터 2025년까지 축적된 개인 일기, 업무 노트, 성찰 일지, 지도교수 피드백 등의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Illeris의 통합적 학습 이론을 분석 틀로 삼아 존재 방식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시적으로 분석하였다. 본 연구에서 설정한 세 가지 연구문제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비서에서 연구자로의 이행은 단일한 사건에 의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직무 현장에서 축적된 정체성 불일치와 소외감이 기존 의미 체계의 임계점에 도달하면서 시작된 점진적 과정이다. 일상의 견고한 안정성 이면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을 때, 20년 인생 계획에 대한 조언, 자녀가 던진 질문, 코칭 칼럼 등의 계기들이 촉매로 작용하여 유예되었던 학습 동기를 강하게 활성화하였다. 초기 대학원 진학을 통한 코칭 공부는 기존의 비서 직무 스키마와 결합하는 동화학습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자기 자신을 탐구의 대상으로 마주하게 한 NLP 수업을 통해 기존 인식 자체의 재편을 요구하는 학습으로의 질적 전환을 맞이하였고, 이는 연구자로 진입하는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다.
둘째, 연구자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경험한 충돌과 전환은 회사라는 역할 중심의 공간과 대학원이라는 실존적 탐구의 공간을 동시에 살아가는 이중 구조 속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비서로서의 요구와 박사과정생으로서의 학업 몰입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내적 균열과 저항은 학습을 심화시키는 실질적 조건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도교수님의 지속적인 피드백과 이메일, 그리고 B대학교 튜터로서 만난 성인학습자들과의 관계적 상호작용은 고립된 내적 성찰을 넘어 연구자 자아상을 사회적으로 확인하고 내면화하는 결정적 장치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조절학습의 심화는 경제적 이해나 기준을 내려놓고 사직을 감행하는 결단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이미 내적으로 완성되어 가던 존재론적 전환이 외적 행위로 표면화된 결과였다.
셋째, 비서에서 연구자로의 이행 과정은 내용, 인센티브, 상호작용의 세 차원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작동한 비가역적인 존재론적 전환의 의미를 지닌다. 내용 차원에서 학습은 지식과 학위라는 도구적 수단을 넘어 세계를 해석하는 내적 틀 자체를 바꾸는 실존적 사유의 과정이었으며, 인센티브 차원에서는 불안과 갈등이라는 정서적 에너지를 성장의 동력으로 전환하는 과정이었다. 상호작용 차원에서는 공동체 안에서 연구자의 언어를 체화하는 관계적 확장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20년에 걸친 과거의 비서 경험은 타인의 성장을 돕고 학문 공동체를 촉진하는 현재 연구자 및 교수자로서의 주체성을 가능하게 한 고유한 학습 자원으로 재구성되었다.
이상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논의를 전개한다.
첫째, 갈등과 불안이 지닌 교육적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에서 존재론적 이행을 추동한 원동력은 안정이 아닌 내면의 균열이었다. Mezirow(1991)의 혼란스러운 딜레마는 이를 설명하는 이론적 개념을 제공하며, Illeris(2007)가 제시한 인센티브 차원 역시 불안과 저항이 변화를 촉진하는 에너지로 기능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교육 현장에서는 갈등과 불안을 제거해야 할 부정적 상태가 아니라 성장을 향한 학습의 신호로 인식하도록 지원해야 하며, 교수자는 새로운 앎과 존재 방식으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둘째, 평생학습의 지향점은 개인적 성장을 넘어, 타자와 연대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자아초월로 확장될 수 있다. 본 연구에서 학습의 동기는 초기에는 자기 성장에 초점을 두었으나, 학업이 심화될수록 타자의 성장과 사회적 기여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의미 있는 점은 그 확장이 외부 세계를 향한 단순한 관심의 확대가 아니라, 명상과 성찰을 통한 내면 탐구 및 지나온 학습 서사에 대한 성찰적 재해석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Maslow(1971)의 자아초월 욕구나 이성엽(2023)의 의식 변용 논의를 지지하며, 자아초월이 특별한 영적 체험이 아닌 일상적인 학습과 실존적 성찰의 실천 속에서도 가능함을 보여준다. 특히 연구자의 학습 서사는 교육 현장에서 성인학습자들과 공감과 배려의 언어로 소통하게 하는 실천적 에너지가 되었다. 이는 학습자의 존재론적 성숙이 자아실현을 넘어 타인과의 연대를 촉진하고 포용적 교육 생태계 조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확인시킨다. 이러한 발견은 평생학습의 지평을 존재론적 성숙의 수준으로 재설정할 필요성을 시사한다.
셋째, 성인학습자의 생애 서사는 의미 있는 학습 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 과거의 경력은 연구자 정체성을 형성하는 토대로 재구성되었으며, 전환의 핵심은 경험 자체가 아니라 경험을 해석하는 관점의 변화에 있었다. 본 연구는 이 과정을 재맥락화를 통한 존재론적 통합이라는 개념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이는 ‘경험이 곧 교과서’라는 Lindeman(2013)의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경험을 새로운 삶 속에서 재맥락화하는 성찰 과정 자체가 존재론적 전환의 기제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교육 현장에서는 학습자의 생애 경험을 단순한 배경 정보가 아니라, 성찰과 의미 재구성의 대상이자 중요한 학습 자원으로 다루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성인 대상 교과나 워크숍에 생애사 기반 성찰 활동을 도입하고, 성찰 일지 및 자기분석 보고서 작성을 상담과 교육 과정에 연계함으로써 학습자가 이전 경력을 재맥락화하고 새로운 존재론적 통합을 이루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한 개인의 구체적인 생애 서사를 심층적으로 탐색함으로써 성인학습자의 존재론적 전환 과정을 실존적 경험의 차원에서 구체화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또한 Illeris의 통합적 학습 이론을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와 접목하여, 성인학습자의 정체성 전환 과정을 내용, 인센티브, 상호작용의 세 차원에서 분석하는 이론적·방법론적 접근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의가 있다. 나아가 본 연구는 성인학습자의 발달 과정을 보다 역동적이고 전인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특히 성인학습자의 내적 갈등과 생애 경험을 단순한 문제 상황이 아니라 학습과 전환의 자원으로 재해석할 필요성을 제기하며, 실제 대학 및 평생교육 현장에 실천적 시사점을 제공한다.
본 연구의 한계는 다음과 같다.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는 경험의 깊이를 확보하는 데 강점이 있으나, 연구 참여자가 연구자 본인 한 명이라는 점에서 결과의 일반화에 제약이 따른다. 또한 자료의 상당 부분이 개인 일기, 성찰 기록 등 회고적 서사에 의존하고 있어 해석의 주관성을 내포하며, 내러티브 재구성 과정에서 현재의 인식이 과거 경험을 재해석하는 영향 또한 배제하기 어렵다.
이러한 한계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후속 연구를 제언한다. 첫째,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성인학습자의 존재론적 전환 과정을 비교·분석함으로써, 본 연구에서 드러난 전환의 구조가 갖는 특수성과 보편성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비형식·무형식 학습 경험이 형식교육 참여 및 정체성 전환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탐구하는 연구가 요청된다. 형식·비형식·무형식 학습의 상호작용이 성인학습자의 존재론적 전환에 미치는 영향을 체계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은 평생학습의 통합적 이해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학습자의 존재론적 전환을 촉진하는 교육적 설계에 관한 실천 연구를 제언한다. 본 연구에서 전환의 과정은 형식 학습, 성찰적 글쓰기, 명상 및 마음챙김 기반 학습, 대화적 학습, 그리고 몸을 통한 체화된 학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는 존재론적 전환이 인지적 차원을 넘어 신체적·정서적·관계적 차원을 아우르는 통합적 과정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실제 교육 현장에서 다양한 실천 양식이 어떻게 설계되고 적용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연구가 후속 과제로 남는다.
본 연구가 성인학습자의 존재론적 전환을 이해하는 하나의 의미 있는 탐색적 시도로 기능하고, 후속 연구를 통해 다채로운 생애 맥락과 확장된 이론적 틀 속에서 더욱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References
-
강예린·최애경(2019). 고경력 비서의 직업정체성 형성과정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 비서· 사무경영연구, 28(1), 113-142.
[https://doi.org/10.35605/jss.2019.03.28.1.113]
-
구유정·오석영·박수연(2021). 성인학습자의 대학생활 경험이 갖는 교육적 의미에 대한 내러티브 탐구. 평생학습사회, 17(1), 27-48.
[https://doi.org/10.26857/JLLS.2021.2.17.1.27]
-
구자영·이성엽(2025). 형식교육에서의 자아초월 학습: 늦깎이 성인학습자의 박사과정 진입 여정에 관한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 Andragogy Today, 28(4), 81-111.
[https://doi.org/10.22955/ace.28.4.202511.81]
-
김민규·이찬(2018). 직업상담사의 무형식학습이 전문직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과 학습민첩성의 매개효과. HRD 연구, 20(3), 205-229.
[https://doi.org/10.18211/kjhrdq.2018.20.3.008]
-
김정원·조대연·박지원·장은하(2023). 경력단절여성에게 필요한 성인역량에 관한 요구분석. 문화와융합, 45(3), 403-416.
[https://doi.org/10.33645/cnc.2023.03.45.03.403]
-
박규미·김정민·홍아정(2019). 대학생의 주도적 경력행동을 통한 학습 경험과 직업정체성 형성에 관한 연구: 비교과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교육문화연구, 25(6), 467-494.
[https://doi.org/10.24159/joec.2019.25.6.467]
-
양태연·김미화(2023). 가치지향적 경력 전환의 경험에 대한 자문화기술지: 가슴으로 향하는 여정. 교육인류학연구, 26(3), 105-136.
[https://doi.org/10.17318/jae.2023.26.3.003]
-
오세경(2024). 평생교육사의 무형식학습 경험을 통해 본 직업정체성 형성에 관한 연구: Illeris 학습 모델을 중심으로. 문화교류와 다문화교육, 13(4), 673-693.
[https://doi.org/10.30974/kaice.2024.13.4.26]
-
오세경·배을규(2021). 대학 행정직원의 일터 멘토링 경험을 통한 직업정체성 형성 요인에 관한 사례연구: Illeris의 일터 학습 모델을 중심으로. 교육문화연구, 27(5), 385-408.
[https://doi.org/10.24159/joec.2021.27.5.385]
-
윤여각(2025). 폴 랑그랑의 평생교육론 연구. 평생학습사회, 21(2), 1-24.
[https://doi.org/10.26857/JLLS.2025.5.21.2.1]
-
이상주·전병주(2019).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성인 학습자의 학습 경험과 직업정체성 형성에 관한 연구: 대학생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인문사회 21, 10(4), 1409-1422.
[https://doi.org/10.22143/HSS21.10.4.101]
-
이성엽(2023). 코칭과 자아초월의 만남을 위한 小考. 교육컨설팅코칭연구, 25-42.
[https://doi.org/10.31137/ECC.2023.0.1.25]
-
이영희·현영섭(2025). 경력적응모형에 기반한 LiFE 사업대학 성인학습자의 적응준비, 적응자원, 적응행동, 적응결과 간의 관계. 평생학습사회, 21(2), 162-197.
[https://doi.org/10.26857/JLLS.2025.5.21.2.162]
-
이정우·김진희·강충서(2024). 중장년층의 경력전환역량으로서 진로인식 및 직무지식에 대한 탐색: 교육수요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평생학습사회, 20(4), 185-210.
[https://doi.org/10.26857/JLLS.2024.11.20.4.185]
-
이지은·박윤희(2020). 비서의 경력전환 경험을 통한 전환학습 과정에 관한 연구. 비서· 사무경영연구, 29(2), 61-101.
[https://doi.org/10.35605/jss.2020.06.29.2.61]
-
이희은·리상섭(2022). 성인학습자의 구직역량 개발을 위한 경력별 교육요구 분석. 교육컨설팅코칭연구, 6(4), 5-27.
[https://doi.org/10.31137/ECC.2022.6.4.5]
-
정희선·이성엽(2022). 제2의 직업을 찾은 사람들의 변화 욕망과 삶의 전환에 나타난 평생교육적 함의. 교육컨설팅코칭연구, 6(2), 27-51.
[https://doi.org/10.31137/ECC.2021.6.2.27]
-
정희선·이성엽(2026). 평생교육사의 미메시스적 경력 태도와 일의 의미 탐색. 평생학습사회, 22(1), 74-99.
[https://doi.org/10.26857/JLLS.2026.2.22.1.74]
-
최근정·한숭희(2024). 포스트-평생학습과 학습의 존재론적 전환. 평생교육학연구, 30(3), 1-40.
[https://doi.org/10.52758/kssle.2024.30.3.1]
-
홍영숙(2015). 내러티브 탐구에 대한 이해. 내러티브와 교육연구, 3(1), 5-21.
[https://doi.org/10.25051/jner.2015.3.1.001]
-
홍영숙(2020). 내러티브 논문작성의 실제. 내러티브와 교육연구, 8(3), 7-28.
[https://doi.org/10.25051/jner.2020.8.3.001]
-
황세연·김미경(2025). Kano 모델을 활용한 성인학습자의 평생학습에 대한 방향성 연구-성인 진로개발역량 향상교육 중심으로. 한국건강사회융합연구, 4(2), 37-54.
[https://doi.org/10.64763/kc.2025.4.2.37]
- Bélanger, P. (2016). Self-construction and social transformation: Lifelong, lifewide and life-deep learning. Hamburg, Germany: UNESCO Institute for Lifelong Learning.
-
Clandinin, D. J. (2006). Narrative inquiry: A methodology for studying lived experience. Research Studies in Music Education, 27(1), 44-54.
[https://doi.org/10.1177/1321103X060270010301]
-
Connelly, F. M., & Clandinin, D. J. (1990). Stories of experience and narrative inquiry. Educational Researcher, 19(5), 2-14.
[https://doi.org/10.2307/1176100]
- Delors, J., Al Mufti, I., Amagi, I., Carneiro, R., Chung, F., Geremek, B., Gorham, W., Kornhauser, A., Manley, M., Padrón Quero, M., Savane, M.-A., Singh, K., Stavenhagen, R., Suhr, M. W., & Zhou, N. (1996). Learning: The treasure within. Paris: UNESCO.
-
Dirkx, J. M. (2006). Engaging emotions in adult learning: A jungian perspective on emotion and transformative learning. New Directions for Adult & Continuing Education, 2006(109).
[https://doi.org/10.1002/ace.204]
- Faure, E., Herrera, F., Kaddoura, A. R., Lopes, H., Petrovski, A. V., Rahnema, M., & Ward, F. C. (1972). Learning to be: The world of education today and tomorrow. Paris: UNESCO.
- Fenwick, T. J. (2003). Learning through experience: Troubling orthodoxies and intersecting questions. Malabar, FL: Krieger Publishing Company.
-
Hoggan, C. D. (2016). Transformative learning as a metatheory: Definition, criteria, and typology. Adult Education Quarterly, 66(1), 57-75.
[https://doi.org/10.1177/0741713615611216]
-
Illeris, K. (2003). Towards a contemporary and comprehensive theory of learning. International Journal of Lifelong Education, 22(4), 396-406.
[https://doi.org/10.1080/02601370304837]
-
Illeris, K. (2007). What do we actually mean by experiential learning. Human Resource Development Review, 6(1), 84-95.
[https://doi.org/10.1177/1534484306296828]
-
Illeris, K. (2014). Transformative learning re-defined: As changes in elements of the identity. International Journal of Lifelong Education, 33(5), 573-586.
[https://doi.org/10.1080/02601370.2014.917128]
-
Illeris, K. (2018). An overview of the history of learning theory. European Journal of Education, 53(1), 86-101.
[https://doi.org/10.1111/ejed.12265]
- Jarvis, P. (2006). Towards a comprehensive theory of human learning. London: Routledge.
- Lindeman, E. (2013). 성인교육의 의미(강대중·김동진 역). 서울: 학이시습. (원저 1926년 출간)
- Maslow, A. H. (1971). The farther reaches of human nature. New York: Viking press.
- Mezirow, J. (1991). Transformative dimensions of adult learning. San Francisco: Jossey-bass.
-
Saleh, M., Menon, J., & Clandinin, D. J. (2014). Autobiographical narrative inquiry: Tellings and retellings. LEARNing Landscapes, 7(2), 271-282.
[https://doi.org/10.36510/learnland.v7i2.665]
-
Super, D. E. (1980). A life-span, life-space approach to career development. Journal of Vocational Behavior, 16(3), 282-298.
[https://doi.org/10.1016/0001-8791(80)90056-1]
- Taylor, E. W., & Cranton, P. (2012). The handbook of transformative learning: Theory, research, and practice. Hoboken, NJ: John Wiley & Sons.
소 속: 아주대학교 전공설계지원센터 연구교수
연 락 처: sue0727@ajou.ac.kr
연구분야: 성인교육, 평생학습, 자아초월교육
![[그림 1] [그림 1]](/xml/50589/JLLS_2026_v22n3_85_f001.jpg)
